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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사슬을 끊는 지혜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22호 35면

며칠 전 법원 부근의 아동보호센터를 방문했다. 20명가량의 아이들이 저녁을 먹고 선생님들과 함께 놀거나 공부를 하고 있었다. 저소득층이나 한부모 가정, 조손 가정 등 저녁 시간에 가족과 같이 지낼 수 없을 만큼 가정환경이 어려운 아이들이 대부분인 듯했다. 그렇지만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들의 반짝이는 눈빛과 웃고, 질문하는 밝은 표정에 마음이 훨씬 가벼워졌다. 그런데 그곳을 나오려 할 때 여교사가 질문을 했다. “많은 아이가 화로 꽉 차 있는데, 어떻게 해야 풀 수 있을까요?” 이렇게 밝은 얼굴의 아이들이 화로 꽉 차 있다니? 질문 자체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선생님들의 설명을 들으면서 아이들의 실정을 너무 몰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아이들을 때리고 심지어는 칼로 찌르는 난폭한 아이가 있는데, 아무리 혼내고 타일러도 고쳐지지 않는다고 했다. 개미를 따라 다니면서 밟아 죽이는 아이, 자기 팔에 칼로 계속 상처를 내는 아이도 있다고 했다. 부모가 이혼·재혼을 거듭하며 아이를 버리거나 새 부모가 구타하는 경우도 상당히 많다고 한다. 아이들은 따뜻한 보살핌을 받은 경험이 없어 늘 불안해하고, 과자 한 쪽을 놓고도 심하게 싸우며, 자기존중감도 아주 약하다는 것이다. 이런 상태가 계속되다 보니 자신에 대해 항상 화가 나있고, 이 감정을 처리하지 못해 괴로워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정을 듣고 보니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아이들은 세심한 보살핌과 이해를 받아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연약한 존재인데 그들의 환경이 너무 힘겨운 것 같았다. 따뜻한 돌봄을 제대로 받지 못하면 생명이 시들고 그 자리에는 분노라는 잡초가 자라나게 된다. 어린 나이에 이 정도의 분노를 느낀다면 성인이 돼 얼마나 고통스러운 삶을 살게 될까?

분노는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정상적인 분노는 부당한 일에 대해 자연스레 일어나는 건강한 감정이다. 잘못된 것에 분노하고 이를 표출함으로써 그 영향력에서 자신을 분리시켜 정체성을 유지하며 자신을 보호하는 기능을 한다. 하지만 병적인 분노는 합리적 근거 없이 과도한 반응을 하며 타인을 증오하고 공격하게 만든다. 우리 사회의 특징 중 하나는 병적인 분노를 품은 사람이 많고 그 수위도 매우 높다는 점이다. 정치, 재판, 인터넷 공간에서 비합리적인 주장을 하며 분노심에 펄펄 뛰는 사람을 많이 본다.

요즈음 늘고 있는 묻지마 살인사건이 극단적인 예라고 하겠다. 나는 이런 사건을 여러 번 처리한 경험이 있는데 범인들은 범행동기에 관해 “피해자가 너무 행복해 보여서 미웠다” “무조건 길에서 처음 만나는 사람을 해치기로 마음먹었다”는 대답을 했다. 환경이 매우 열악하고 불우한 사람들인데 분노가 너무 커 합리적인 사고를 할 능력이 없는 상태에 있는 것이다. 사회나 가정에서 거부당한 수치심과 열등감 때문에 자신을 용납하지 못해 분노가 쌓이다가, 우연한 기회에 자신에 대한 분노가 타인에게 투사돼 증오심으로 폭발하는 것이다.

청소년의 자살도 많은 경우 분노에서 시작된다. 자신에게 공부를 강요하는 엄마에게 복수하겠다며 자살하는 아이도 여럿 있다. 얼마나 분노가 컸기에 목숨까지 끊을까?

묻지마 살인사건은 한국 사회에서 한 해에 650건 이상 일어나고 있고, 5년 사이에 두 배 가까이 늘었다. 청소년(15∼24세) 자살도 10년 전에 비해 50% 이상 늘어 10만 명당 15명에 이른다. 분노의 어두움이 이렇게 커지고 있는 현실이다.

사람은 사랑과 보살핌을 받으면 정신이 활짝 피어나지만, 학대와 억압을 받아 상처가 깊어지면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고 공격적으로 변한다. 분노와 공격성이 자신을 향하면 자해나 자살을 하게 되고, 타인을 향하면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게 된다. 헨리 나우웬은 범죄자를 “폭력으로 남을 해치는 방법 말고는 사랑받고 싶은 욕망을 달리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분노의 밑바닥에는 사랑에 대한 필사적인 갈망이 있다.

사랑과 배려 없이는 분노를 줄일 수 없다. 상처 입은 아이들과 성인에 대해 분노를 처리하고 치유할 프로그램을 세워 실행해야 한다. 우리를 위협하는 병적인 분노에 대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새롭게 대처해야 할 때다. 병적인 분노는 우리가 온 힘을 다해 물리쳐야 할 어두운 악령이다.



윤재윤 법이 치유력을 가질 수 있다는 믿음으로 소년자원보호자제도, 양형진술서제도 등을 창안하고 시행했다. 철우 언론법상을 받았으며 최근엔 수필집 『우는 사람과 함께 울라』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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