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알 회계·초고속 경영' 돌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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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업체에 근무하던 K씨는 최근 삼성물산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으면서 "정규 대리직으로 입사해도 되고, 연봉은 더 받는 대신 1년 계약직을 골라도 된다" 는 말에 계약직을 택했다.

인재확보에 목말랐던 삼성은 기존의 채용방식을 과감히 바꿔 고용형태를 직원들이 스스로 고르도록 했고, K씨는 안정적인 직장보다 능력에 맞는 대우를 받는 게 더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 회사는 인터넷회사를 계속 분사화해 2005년까지 1백개의 자회사를 거느린 지주회사로 변신할 작정이다. 이 회사 임은석 부장은 "국내의 대표적인 인터넷기업으로 변신하기 위해 기존의 인터넷 벤처기업을 벤치마킹해 필요한 시스템을 갖춰나갈 방침" 이라고 말했다.

재계에 벤처식 신경영 도입 바람이 한창이다. '벤처형 지주회사' '스피드&투명경영' '미국식 연봉체제' 등 새로운 경영 시스템이 잇따라 도입되고 있다.

인터넷 벤처기업들의 영향력 확산과 경영환경의 디지털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면서 기존의 기업경영 패러다임을 송두리째 바꿔야 한다는 대기업들의 위기감도 높아가고 있다.

한국통신의 송영한 마케팅본부장은 "공기업조차 사내 벤처나 벤처펀드를 만드는가 하면, 단위 부서장에게 10억원 규모의 전결권을 주는 등 새 경영방식을 도입하고 있다" 고 강조했다.

삼성경제연구소의 김정호 박사는 "대기업도 직원에게 내가 주인이라는 동기를 주고, 무거운 몸집에서 발빠르게 움직이는 조직으로 변신하는 등 벤처식 경영을 도입해야 산다" 고 지적했다.

◇ 벤처가 주도하는 신경영〓한글과컴퓨터.미래산업.메디슨 등 벤처업계에서 지주회사 및 벤처펀드 설립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전하진 한컴 사장은 "대기업들이 투자할 때 경영권 확보에 주력하는 것과 달리 벤처기업들은 투자이익의 극대화와 관련기술 확보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다" 고 말했다.

그러다보니 소유와 경영의 분리도 가속화되고 있다. 지난해부터 지주회사로의 변신에 나선 한컴은 네띠앙.하늘사랑 등 17개사에 5~65%의 지분 투자를 하고 있지만 매달 한차례 열리는 '가족회사 경영진 회의' 에 田사장이 사외이사로 참여하는 것을 빼고는 경영 관여는 일절 없다.

지난해 매출 2천3백억원을 올린 휴대폰 제조업체 팬택의 창업주인 박병엽씨의 나이는 불과 38세. 朴씨는 최근 사장에서 부회장으로 승진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고 LG정보통신 전무를 역임한 박정대(55)씨를 사장으로 영입했다.

朴부회장은 "팬택이 올해 7천억원의 매출 목표를 달성하려면 나같은 엔지니어보다 경영 전문가가 더 필요하기 때문" 이라고 배경을 설명했다. 인터파크의 이기형(37)사장도 최근 유종리(44)사장을 공동대표로 영입해 경영을 맡기고 자신은 해외사업에만 전념하겠다고 밝혔다.

투명경영을 추구하는 것도 벤처기업들의 특징. 한컴에서는 누구나 볼 수 있는 사내통신망에 사장을 비롯해 임직원의 업무 추진현황이 게시된다.

의사결정 과정을 '팀장(사원 또는 과장)-사장' 체제로 단순화시키는 등 스피드 경영도 주목된다. 라이코스코리아는 하급직원도 1억~2억원 정도는 스스로 결제한다. 정문술 사장은 "부작용도 있지만 스피드 경영을 위해 전결범위를 더 늘릴 생각" 이라고 말했다.

◇ 대기업도 벤처식 경영〓현대.삼성.LG.SK 등 대기업은 물론 한국통신 등 공기업까지 올해 사업전략의 우선순위로 지주회사 개념을 도입한 인터넷 벤처투자를 선언했다.

김병일 공정거래위원회 사무처장은 "올해부터 분사시 총액출자 제한 문제나 지주회사에 대한 배당소득 이중과세 문제 등이 해결돼 지주회사 설립이 활성화될 것" 이라고 말했다. 자유기업센터 최승노 선임연구원은 "지주회사 설립이 허용되고,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면 자연스럽게 책임경영이 이뤄진다" 고 강조했다.

경영방식의 벤처화도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유리알 회계나 스피드 경영, 파격적인 인센티브 등도 대기업에 속속 도입되고 있다.

기업들은 "기존의 경영방식으로는 인터넷 사업 경영이 어렵다고 판단하기 때문" 이라고 말했다. 서울대 조동성 교수는 "대기업들도 유리알 회계나 스피드 경영을 외면하면 생존할 수 없다" 고 지적했다.

특히 파격적인 인센티브제는 요즘 재계의 화두. 우수 인재들이 벤처로 대거 빠져나가는 '엑소더스 현상' 이 가속화하면서 현대.삼성 등 대기업마다 스톡옵션제 도입을 선언했다. 또 회사 이익금 중 일부를 임직원들에게 나눠주는 이익배분제를 시행하는 곳도 있다.

산업연구원 기업자유센터 고동수 박사는 "파격적인 대우가 없으면 대기업도 우수직원의 이탈로 경쟁력을 잃게 된다" 고 말했다.

대기업들의 벤치마킹 형태도 달라졌다. 인터넷 사업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GE.IBM.크라이슬러 등 90년대 주요 벤치마킹 대상이었던 제조업체 대신 시스코.아마존 등 해외 벤처기업들은 물론 국내 인터넷 기업들에 대한 대기업들의 연구가 많아졌다.

연세대 정승화 교수는 그러나 "대기업의 무조건적인 벤처 따라가기는 위험하다" 며 "대기업은 리스크가 적으면서도 규모가 큰 곳을, 벤처기업은 위험하지만 틈새시장을 겨냥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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