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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찾은 DJ “20억 외 더 받은 것 없습니다” 고해성사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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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9월 5일 국민회의를 창당하면서 화려하게 복귀한 DJ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YS(김영삼 대통령)는 점점 힘이 빠져가는 듯했다. 다음 대선은 정말 해 볼 만했다. 정계복귀 반대 여론이 많았지만 그걸 이겨내지 못할 DJ가 아니었다. 좋은 일만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애당초 DJ의 운명이 그렇게 평탄할 것이라고 기대한 것 자체가 무리였다.국민회의 창당 한 달 전께인 8월 1일, YS의 핵심 측근인 서석재 총무처 장관이 7개 언론사 기자들과 저녁식사를 했다. 그는 정치 자금을 풀지 않아서 민자당이 6·27 지방선거에서 졌다고 했다. 술기가 오르자 ‘오프더레코드(비보도)’로 폭탄발언을 했다. “전직 대통령 한 사람이 4000억원의 가차명 예금을 갖고 있는데 책임을 안 물으면 2000억원을 내놓겠다고 제의해 왔다”고 말했다. ‘오프’가 지켜질 리 만무했다. 3일 아침 조간에 대서특필됐다. 여름휴가 중이던 YS는 곧바로 서 장관을 해임했다. 수사에 나선 검찰은 “서 장관이 시중의 과장된 소문을 전한 것”이라며 덮어버렸다.

불씨는 꺼진 게 아니었다. 두 달 뒤인 10월 19일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다시 불이 붙었다. 민주당 박계동 의원은 ㈜우일양행 명의로 신한은행 서소문 지점에 예치된 110억원짜리 예금계좌 조회표를 흔들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이라고 했다. 사흘 뒤 이현우 전 청와대 경호실장이 검찰에 자진출두했다. “우일양행 돈은 노 대통령 재임기간 중 사용하고 남은 돈이고 청와대 전 경리과장 이태진이 관리해왔다”고 고백했다. 노 전 대통령도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다. “집권기간 중 기업체들로부터 (통치자금으로) 5000억원을 받아 사용했고 이 중 1700억원가량이 남았다”고 했다. 구체적인 사용 내역에 대해선 입을 다물었다.

박계동 의원이 폭로한 날 승용차 안에서 DJ에게 물었다. “총재님, 박 의원 뉴스를 들으셨습니까.” “알고 있어. 그런데 사실이 아닐 거야… 좀 더 지켜 보자고.” 왠지 조심스러운 반응이었다. 총재가 그런 입장이니 국민회의도 적극적인 공세를 펴지는 않았다. 검찰은 23일 DJ 비서 출신인 박광태 의원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 DJ는 아마 검찰이 자신을 겨냥한다는 걸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말을 안 해주니 측근들이 알 도리가 없었다. 박지원 대변인은 “우린 한 푼도 안 받았다”고 발표까지 했다.

10월 24일 DJ가 5박6일 일정으로 중국 출장을 떠났다. 아태학술회의 참석차였다. 청천벽력은 27일에 터졌다. DJ가 중국 국빈관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했다. 노 전 대통령으로부터 20억원을 받았다는 거였다. 발표는 수행했던 임채정 의원이 대신했다. “선거운동에 대한 격려와 위로 차원이었고 대가는 없었다”고 했다. 기자들의 질문에는 DJ가 직접 답했다. “노 전 대통령이 당시 모 의원을 통해 민자당 김영삼 후보에게 수천억원을 줬다는 제보가 있다. 이 점에 대해서도 밝혀야 한다”고 역공을 폈다.

다들 황당해했다. 그런 발표를 왜 중국에서 하느냐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물론 이유가 있었다. DJ의 긴급 기자회견 하루 전날인 26일, 민자당 김윤환 대표가 이상한 말을 했다. “조만간 세상이 깜짝 놀랄 일이 터진다. DJ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거였다. 중국에서 이 발언을 보고받은 DJ는 다급해졌다. 김 대표가 DJ가 20억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곧 터뜨리겠다는 신호를 보낸 것으로 해석한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먼저 고백해 버려야지 피해를 줄일 수 있다는 게 DJ의 판단이었다. 돌이켜보면 DJ는 측근들도 모르게 꽤나 속앓이를 한 것 같다. 그 몇 달 전 신동아(8월호)와의 인터뷰에서 “노 전 대통령의 정치자금을 받았느냐”는 질문이 있었다. DJ의 답변은 아리송했다. “지금은 말하지 않겠다. 노씨 측으로부터 무슨 얘기가 나오면 그때 얘기하겠다.” 내용상으론 사실상의 시인이었다. 이처럼 양심에 걸려 속으로 애만 태우다 김윤환 대표의 말을 듣고는 놀라 털어놔 버린 것이다.

지지자들의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국민회의 박지원 대변인은 “국민과 당원, 언론에 사과한다”는 성명까지 내놨다. 이런 와중에 신한국당 강삼재 사무총장은 기자들에게 “DJ는 20억원만 받은 게 아니다. 플러스 알파가 있다”고 공공연히 주장했다. 언론도 자꾸 그런 식으로 보도했다. 당시 DJ도 YS가 노 전 대통령으로부터 3000억원을 받았다는 정보를 입수한 상태였다. 그걸 밝히라는 주장도 공개적으로 했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은 비자금 사용내역에 대해서는 일절 함구했다. YS는 그런 의혹 제기에 대꾸조차 안 했다. 자신은 이미 고백을 했는데 상대방은 입을 싹 씻으니 DJ로선 팔짝 뛸 노릇이었다. 하지만 별 도리가 없었다.

11월 12일 DJ는 서교동 성당에 가서 김종국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했다. “20억원 외에는 더 받은 게 없다”는 내용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이희호 여사와 아들 며느리들, 그리고 손자·손녀들까지 다 불러 모았다. 식솔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부끄러운 아버지가 아니니 확신을 가져라. 나에게 굉장한 어려움이 있겠지만 아버지를 믿고 흔들리지 마라.”

DJ는 죽든 살든 둘 중 하나라는 생각을 한 것 같다. 11월 13일 당무회의 발언은 비장했다. “전면전이 시작됐다. 이젠 이기느냐 파멸하느냐가 전부다. 타협은 없다…. 그동안 몇십 번 죽음의 고초를 당했고 그것들을 넘으며 살아왔다. 지금부터는 어떤 영화도 없다…. 이 불의한 정권과 적극 투쟁하자.” 12월 3일에는 한겨울에 영등포 보라매공원에서 장외집회까지 강행했다. 어떻게 해서든 정국을 바꿔야 한다는 절박감은 그만큼 강했다.

1996년 새해가 되자 상황은 좀 달라졌다. 비자금은 더 이상 전면에 등장하진 않았다. 이미 DJ는 충분히 상처를 입었고 청와대나 한나라당도 대선자금에서 떳떳할 수 없으니 그 선에서 발을 빼도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더 결정적인 건 제15대 4·11 총선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DJ는 이 선거를 YS에 대한 중간평가로 삼으려 했다. 3월 25일 기자회견에서 DJ는 “총선에서 국민회의가 3분의 1 이상의 의석을 얻지 못하면 여당이 내각제 개헌과 정계개편을 시도해 정국이 혼란에 빠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국민회의의 총선 컨셉트는 ‘독주정권 견제’였다. 기자회견을 끝내고 나오면서 DJ가 물었다. “장 동지, 이번 총선에서 몇 석이나 얻을 것 같아요?” “한 80석 이상은 될 것 같습니다.” “전국구를 빼고, 아니면 넣고?” “전부 다 포함해서 말입니다.” “무슨 소리야, 이 사람아. 얼마든지 100석이 가능하니 두고 보라고.” 95년 6·27 지방선거에서 대승을 거뒀기 때문일 것이다. DJ는 자신만만했다.

청와대와 여당도 손을 놓고 있지는 않았다. 신한국당은 95년 말 민주당과 합당하면서 당명을 한나라당으로 바꿨다. 96년 초에는 이회창 전 총리와 박찬종 의원을 영입했다. 한나라당의 총선 공천작업은 YS의 차남 김현철씨가 주도했다. 선거 컨셉트는 ‘개혁과 세대교체’였다.
선거운동 과정에서 청와대 장학노 부속실장 비리가 터졌다. 국민회의에겐 낭보였다. 선거 승리에 대한 희망이 넘쳤다. DJ는 전국구 14번을 받았다. 지역구에서 80석 이상 받아야 당선될 수 있는 번호였다. 이해찬 선거기획단장이 “총재는 전국구 1번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DJ가 반대했다.

선거 결과는 끔찍했다. 신한국당은 지역구 121석에 전국구 18석을 더해 139석을 확보했다. 국민회의는 79석(지역구 66석+전국구13석)에 그쳤다. 자민련은 51석(41+9)이었다. 내용은 더 나빴다. 14대 총선 때는 제1 야당인 통합민주당이 서울지역 44개 의석 중 26개를 휩쓸었다. 15대에선 의석이 47개로 늘었는데 제1 야당인 국민회의는 18석만 얻었다. 게다가 중진들이 다 떨어졌다. 종로 이종찬, 중구 정대철, 관악갑 한광옥, 성동을 조세형, 중랑을 김덕규, 구로을 김병오 등 당의 부총재급들이 참패했다.

대신 여야를 막론하고 젊고 새로운 인물들이 대거 당선됐다. 국민회의에선 추미애·김상우·신기남·설훈·정동영·천정배 등이 당선됐다. 한나라당도 맹형규·홍준표·김문수·원유철 등이 새롭게 등장했다. 253명의 지역구 당선자 중 41.9%가 초선이었다. 유권자의 메시지는 분명했다. “이젠 새 인물을 보고 싶다”는 거였다. DJ가 내세운 ‘견제’ 대신 한나라당의 ‘세대교체’를 선택한 것이다. 국민회의와 DJ로선 앞이 캄캄할 지경이었다. 당내에서조차 “다음 대선에서 DJ는 힘들겠다”는 패배론이 나오기 시작했다.

DJ는 선거 결과를 전혀 다르게 해석했다. “국민회의는 총선 전 65석이었는데 79석이 됐으니 약진한 것”이라고 했다. 누가 봐도 설득력은 없었다. 당초 100석이 목표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당의 지도자가 기가 죽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것보다는 나았다. 손바닥만 한 희망이라도 있으면 그걸 어떻게든 활용해 판을 바꿔놓는 역량이 DJ에겐 있었다. 95년 지방선거에선 이기고 96년 총선에서 패했다. 1대 1 무승부였다. 이젠 대선이라는 마지막 승부가 남았다. 그게 1년6개월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정리=김종혁 중앙SUNDAY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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