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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 후 허드렛일이라도 하겠다는 마음부터 가져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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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호 24면

2008년 9월 경기도 고양시 일산 킨텍스 전시장에서 열린 노인일자리박람회. 박람회를 찾은 실버 구직자가 취업게시판을 살피고 있다. [중앙포토]

“제 나이가 60인데요, 그동안 애들 교육시키고 생활비 쓰다 보니 저축해 놓은 돈이 5000만원밖에 없습니다. 이 돈으로 재테크를 해서 퇴직 후 30~40년 살아갈 자금을 만들어 볼 수 없을까요?” 투자교육 활동을 하다 보면 이런 질문을 받는 경우가 많다. 5000만원으로 어떻게 30~40년 생활비를 벌 수 있겠는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강창희의 100세 시대 자산관리  

그런데 앞의 사례는 우리나라 평균보다는 형편이 나은 편이다. 지난해 미래에셋 퇴직연금연구소가 수도권 베이비부머 세대 500가구를 조사한 바에 따르면 가구당 보유자산액은 5억4000만원 정도이고, 여기에서 평균 부채액 6000만원을 뺀 순자산은 4억8000만원이었다. 이 중 주거용 부동산의 평가액이 4억6000만원 정도였다. 이를 뺀 금융자산은 2000만원밖에 안 된다. 2000만원으로 어떻게 노후 생활비를 충당할 수 있겠는가. 결국 집을 팔아야 하는데, 베이비부머 세대가 집을 팔려고 내놓기 시작하면 집값은 어떻게 되겠는가.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할 문제다.

대부분의 우리나라 가정이 이런 형편이다. 그런데도 금융회사에서는 ‘편안한 노후 생활을 하려면 10억원은 있어야 한다. 최소한 7억원은 필요하다’는 식의 자료를 발표한다. 물론 미래를 준비하라는 뜻이겠지만, 보통 사람들의 처지에서 보면 너무 먼 이야기들이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단기간에 돈을 불리려는 유혹에 빠지고 있다. 이런 탓인지 우리 사회에 부동산 기획 사기 사건 등이 횡행하고, 서점에 가보면 ‘재산을 ○배로 불리는 법’ ‘X억원 만들기’ 등과 같은 자극적인 제목의 재테크 서적들이 범람하고 있다.

서울에서 4년 동안 특파원으로 일하다가 귀국한 한 일본 언론인이 이런 말을 남겼다. “한국 사람들은 돈을 버는 방법, 즉 입구(入口)관리에는 참으로 열심이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 벌어놓은 돈이 모자랄 경우에는 어떻게 그 환경에 맞추어 살 것인가, 그리고 부자가 됐을 때는 그 돈을 어떻게 아름답게 쓸 것인가를 생각하는 출구(出口) 관리에 대해서는 공부가 되어 있지 않은 것 같다. 가정·학교·사회에서 이런 내용을 안 가르치는 거냐?” 이 말을 듣는 순간 불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얼마나 얼굴이 화끈거렸는지 모른다.

젊은 시절에 열심히 일했는데도 노후 생활비가 모자라는 사례는 미국·일본 같은 선진국에도 많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노후 생활을 해나가는가. 우선 형편에 맞춰 살아갈 방도를 궁리한다. 체면을 버리고 허드렛일이라도 해서 한 푼이라도 생활비를 벌겠다는 각오를 하는 것이다.
1975년 여름 필자는 일본 증권업계에 파견되어 업무연수를 받을 기회가 있었다. 당시 일본 전체 인구 중에서 65세 이상의 고령 세대가 차지하는 비중은 8%대로 지금 우리나라의 비중(11%)보다도 낮을 때였다. 그런데도 그때 일본의 노인들은 체면을 버리고 일을 하겠다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었던 것 같다. 하루는 증권 보관기관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70세는 되었을 것 같은 노인 100여 명이 둘러앉아 증권을 세거나 분류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분들이 젊었을 때는 무슨 일을 했을까 궁금해서 안내하는 분에게 물었더니 공무원, 기업체 간부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던 분들이라고 했다. 받는 보수도 얼마 안 됐다.

우리나라는 어떤가. 미래에셋 퇴직연금연구소가 2009년 수도권 55세 이상 퇴직자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퇴직자들의 정년은 평균 56세로 그들이 기대했던 연령보다 7년 정도 빠른 것으로 나타났다. 또 퇴직 때까지 마련한 노후자금이 실제 필요한 자금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 중 절반 이상은 71세까지는 일을 계속하고 싶어 했다. 일을 해야 한다는 점에서 36년 전 일본의 퇴직자들보다 훨씬 더 절박한 상황인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는 나이 든 사람이 일을 하기가 어려웠다. 할 수 있는 일도 많지 않지만 하고 싶어도 체면 때문에 일을 하기 어려운 사회분위기였던 것이다.

다행인 것은 최근 1~2년 새 우리 사회도 빠른 속도로 바뀌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체면을 버리고 허드렛일이라도 하겠다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것이다. 미래에셋 은퇴교육센터 발간 '은퇴와 투자' 2010년 9월호에는 남이섬에서 청소부로 일하고 있는 71세의 전직 교장선생님이 소개됐다. 남이섬에는 하루 1만 명 정도의 관광객이 드나드는데, 이들이 버린 쓰레기를 4명의 청소부가 치운다. 이렇게 힘든 일을 해 월 100만원 정도를 받는다. 교장에 비해 청소부가 하찮아 보이는 직업일지 모르지만, 이 분이 느끼는 자부심은 똑같다고 한다. 일하는 즐거움과 환경을 가꾸는 보람 속에 일터를 향하는 자신을 “행복한 청소부”라고 소개했다. 지하철 택배 일을 하는 전직 무역회사 사장과 리서치회사의 전문 조사요원으로 일하는 대기업 간부 출신도 있다.

똑같이 몇 억원의 노후자금을 보유하고 있더라도, 무슨 일이든 규칙적으로 일을 하면서 관리하는 사람과, 놀면서 관리하는 사람의 모습은 크게 다르다. 규칙적으로 하는 일이 있는 사람은 비교적 흔들림이 없다. 반면에 놀면서 관리하는 사람은 쓸데없이 욕심을 내거나 소심해지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허드렛일을 해서라도 한 달에 50만원의 수입을 얻는다면 그 효과는 2억원의 정기예금을 갖고 있는 것과 똑같다는 것이다. 말이 쉽지, 2억원의 정기예금을 모으려면 얼마나 힘이 들겠는가. 그런데 월 50만원의 근로소득이 그 2억원의 정기예금과 똑같은 효과가 있는 것이다.

인생 100세 시대에는 언제 어떤 일을 당할지 알 수 없다. 예기치 않은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된다면 부부가 같이 체면을 버리고 허드렛일이라도 하겠다는 마음가짐을 갖고 사는 것이 재테크를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강창희(64) 서울대 농업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일본 도시샤대학원에서 상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1974년 증권거래소에 입사한 뒤 대우증권 리서치센터장, 현대·굿모닝투자신탁운용 대표를 거쳤다. 이후 은퇴설계 전문가로 변신해 미래에셋그룹 퇴직연금연구소장 겸 투자교육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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