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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물자 수출 비상] "샴푸 원료, 탄소섬유도 무기 재료" 규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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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지난해 10월 미국 의회에서 '듀얼퍼(Duelfer) 보고서'가 공개되자 국내 수출 업계는 바짝 긴장했다. 미 중앙정보국(CIA) 수석 무기사찰관인 찰스 듀얼퍼가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의혹을 파헤친 이 보고서에서 이라크에 무기 관련 물자를 공급한 업체로 LG이노테크(현재 방산 부문은 넥스원퓨처로 분리)와 신성컴퍼니 등 한국업체 5개사를 거명했던 것.

보고서는 "이들 업체가 2000~2001년 군용 컴퓨터 장비, 첨단 통신 시스템 등을 팔아 결과적으로 이라크의 재래식 군사력을 증강시켰다"고 지적했다. 다행히 국내 기업들은 이라크가 아닌 인도.요르단.시리아 등의 중개상에 이 물품을 수출했고, 당시에는 이 물품이 전략물자에 포함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 무혐의 판정을 받음으로써 해당 업체들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무역협회 관계자는 "아직도 상당수 국내 수출기업이 '전략물자 수출 통제제도'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며 "미국과 우리 정부가 하반기부터 본격적으로 단속에 나서면 예상치 못한 피해를 보는 기업이 나오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 유명무실한 통제제도=산업자원부에 따르면 지난해 수출 허가를 받은 전략물자는 493건(금액 기준 4억7700만 달러)에 불과하다. 포괄 승인(같은 지역으로 같은 물자를 수출할 경우 허가를 생략하는 제도)을 받아 수출한 전략물자를 합쳐도 37억 달러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전략물자일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품목들의 수출 총액(848억 달러)의 5%도 안 된다. 무역협회가 지난해 주요 전략물자 수출기업 1200여 개를 대상으로 표본 조사한 결과 70여 개 기업이 200여 개의 전략물자를 허가 절차 없이 수출했다.

물론 정부의 고민도 있다. 우선 단속을 강화하면 수출업계의 발목을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정부가 이란.파키스탄에 공작기계를 수출하는 기업들에 대해 수출 자제를 요구했다가 거센 반발을 사기도 했다. 산자부의 한 관계자는 "산업 이외의 용도로 쓰일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는 상태에서 수출을 강행하다가 미국의 추적에 걸리면 회사가 망할 수도 있는 만큼 신중할 것을 요청했지만, 공작기계 수출에 목을 걸고 있는 업체들로선 당장 생사가 걸린 문제여서 해결책을 찾기가 쉽지 않다"고 전했다.

규제 대상 물품 범위도 넓다. 4개 협정에 명시된 전략물자가 아니더라도 최종 사용자를 기준으로 다른 용도(Dual-use)로 전용이 가능할 경우 수출을 포괄적으로 규제할 수 있게 한 이른바 '캐치올'(Catch-all) 제도가 협정마다 규정돼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샴푸에 쓰이는 트리에탄올아민은 화학무기의 원재료가 될 수 있다는 이유로, 인스턴트 커피를 만드는 동결건조기는 생물무기로 쓰일 수 있다는 점에서 수출허가를 받아야 한다. 테니스 라켓에 쓰이는 탄소섬유는 미사일의 재료가 된다는 이유로 수출규제 물품으로 묶여 있다.

◆ 문제는 지금부터=그동안 국내 기업의 적발 사례는 많지 않았다. 정부는 미국의 감시망에 걸려 국내에 통보된 기업 위주로 제재해 왔다. 2003년 W사가 화학무기 제조에 쓰이는 청화소다를 중국을 경유해 북한에 수출하려다 적발돼 해당 기업주가 국내 법원에서 실형을 받았다. 또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리비아 사찰 과정에서 국내 D사가 밸런스 머신(우라늄 농축 과정에서 회전추의 균형을 잡아주는 기계)을 수출한 사실이 밝혀져 1년간 수출입 금지처분을 받았다.

국제적 상황은 점점 더 엄격해지고 있다. 특히 미국은 하반기부터 자국의 수출통제법(EAR)을 확실히 적용할 방침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미국산 부품.기술을 10% 이상(북한.리비아 등 7대 테러지원국) 또는 25% 이상(7대 테러지원국 이외의 국가) 이용해 만든 제품의 수출을 엄격히 감시해 제재하겠다는 것이다. 미국은 불법 수출 기업에 대해 최고 20년간 교역을 금지할 수 있는 규정을 두고 있다. 실제 미국의 A사는 중국에 미사일 관련 장비를 수출했다가 50만 달러의 벌금을 부과받았다. 심성근 산자부 무역전략과장은 "지난해 전략물자 수출통제 체제의 이행과 관련한 안보리의 결의 이후 중국도 이 체제에 가입하려고 준비 중"이라며 "전략물자 규제가 세계무역의 새 규범으로 자리 잡고 있다"고 말했다.

윤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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