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슬롯머신 사건’ 그때 그 사람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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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부산저축은행 비리사건에 은진수 전 감사원 감사위원의 연루 의혹이 제기되면서 은 전 위원이 검사 시절 파헤쳤던 ‘슬롯머신 사건’도 주목을 받았다. 김영삼(YS) 정부 출범 직후인 1993년 슬롯머신 업계의 대부 격인 정덕진·덕일 형제로부터 돈을 받거나 청탁받은 혐의로 정·관계 유력자 10여 명이 구속돼 큰 파문이 일어난 게 슬롯머신 사건이다. 서울지검 강력부 검사였던 은 전 위원은 같은 강력부 소속이었던 한나라당 홍준표 의원과 함께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로 파견돼 이 사건 수사에 참여했다.

 대검 중수부는 당시 검찰의 고위 간부인 이건개 대전 고검장, ‘노태우 정부의 황태자’로 불리며 YS와 정치적으로 대립했던 박철언 당시 국민당 의원 등을 구속했다. 검찰은 이 전 고검장에 대해 “정덕일씨로부터 5억4000여만원을 받았다”며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뇌물수수) 혐의를 적용했다. 이 전 고검장은 “뇌물을 받은 게 아니고 투자 소개를 했을 뿐”이라고 주장했고,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여 뇌물수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이 전 고검장이 “슬롯머신 사건이 언급될 때마다 내 이름이 나오는데 나는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

 박 전 의원은 정씨 형제로부터 6억원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기소됐고 2심에서 징역 1년6월을 선고받았다. 94년엔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돼 14대 국회의원직을 자동 상실했다. 그런 그는 96년 15대 총선 때 대구에서 자민련 후보로 출마해 승리했다. 당시 이 전 고검장도 자민련 전국구 후보로 나와 당선됐다. 슬롯머신 사건을 수사했던 홍준표 의원은 이때 YS의 신한국당(한나라당의 전신) 공천을 받고 서울에서 당선돼 이 전 고검장, 박 전 의원을 국회에서 만나게 된다.

 그간 이 전 고검장은 『대통령제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저서 등을 통해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치적으로 무리한 수사가 이뤄지고 있는데 그 뿌리는 제왕적 대통령제”라며 대통령은 외교·안보·국방 분야를 맡고, 일반 행정은 총리에게 맡기는 이원집정부제로의 개헌과 검찰·국세청 등 권력기관의 독립이 필요하다고 주장해 왔다. 박 전 의원은 저서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에서 “표적수사를 당했다”고 주장했다.

고정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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