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리뷰] '눈 먼 아비에게 길을 묻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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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극단 이루의 '눈 먼 아비에게 길을 묻다'(국립극장 별오름극장, 22일까지.사진)는 제목에서 주는 선문답적인 분위기와는 달리 어렵지 않다. 관객의 감정을 움켜쥐고 웃기고 울리는 극작(손기호)의 짜임새는 매우 꼼꼼하다. 뿐만 아니라 극작을 겸한 연출의 솜씨 역시 탄탄하다. 흔히 극작과 연출을 겸할 경우 대본이 느슨하고 빈틈이 많은 데 반해 이 작품에는 그렇지 않다.

이 작품의 사건은 소아암에 걸린 한 소년(장정애 분)을 중심으로 어머니(염혜란 분)와 아버지(김학선 분)가 보여주는 한 가족의 일상에 국한된다. 대(對)사회적 메시지도 없고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보여주는 적절한 철학적 단상도 눈에 띠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평범한 가족의 재현을 넘어서는 것은 소년의 비극 때문이 아니라 어머니와 아버지가 지니고 있는 특수한 성격 덕분이다. 소년의 부모는 정상적인 지능에 훨씬 못 미치는 '모자란' 인물이다. 각자 아버지의 폭력에 의해 뇌손상을 입은 까닭에 '모자란' 인물이 되고 말았다는 점에서 특히 문제적이다.

따라서 이 작품엔 악인이 없다. 소년의 가족을 돌보아 주는 소년의 큰아버지(유인수 분)와 큰어머니(조은영 분), 이모(백지원 분) 등의 주변 가족 역시 각자의 상처를 지니고 있는 선한 인물이다. 심지어는 개발 논리를 앞세워 환경을 파괴하는 듯한 이장(조주현 역)조차도 이렇다 할 악역을 맡지 않는다. 결국 작품에는 갈등이 없고 '모자란' 부모가 똑똑한 아들의 치료를 감당해야만 하는 비극적 아이러니만 두드러진다.

'모자란' 부모의 '넘치는' 사랑에 관객은 감동한다. 이들 부모 중에서도 더 '모자란' 아버지가 보여주는 단순한 사랑의 방식이 보다 감동적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작품에는 아비에게 길을 묻는 주체가 없다. 소년의 고민과 즐거움, 절망과 희망의 변주가 아쉽다. 섬세한 극짜기와 리얼리즘의 탄탄한 연출 뒤에 정작 눈 먼 아비에게밖에 길을 물을 수 없는 이 비극적 주체의 모습은 찾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황폐해진 현대 사회에서 가족애를 되새겨 볼 좋은 기회를 마련해 준다.

양승국(서울대 국문과 교수.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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