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다 웃다 80年] 6. 고달픈 연구생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 극단에서 연구생으로 있던 나는 온갖 잡일을 하면서 무대에 설 날만 기다렸다. 사진은 무대에서 시루떡 대감을 연기하던 모습.

당시 나 같은 처지의 수습 배우를 '연구생'이라고 불렀다. 극단에서 연구생은 사람 취급도 못 받았다. 큰 극단에는 연구생이 10명 안팎, 작은 극단에는 4~5명쯤 있었다. 딱히 정해진 수습 기간도 없었다. 몇 년씩 고생해도 연구생 신세에서 못 벗어나는 이들도 있었다. 지름길은 하나였다. 얼른 배역을 맡아 무대에서 우뚝 서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선배들에게 잘 보여야만 했다. 눈도장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떠돌이 유랑극단은 여관 생활이 기본이었다. 연구생들은 잡일을 도맡아 했다. 공연에 쓰이는 자잘한 소품을 챙기는 것은 물론, 선배들의 양말과 속옷까지 죄다 빨아야 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선배들의 세숫물부터 챙겼다. 여관집 주인방에서 구리무(로션 크림)를 빌려다 찍어주는 일도 다반사였다. 가난한 시절, 구두 신은 사람이 없었던 게 다행이었다. 아니면 선배들의 구두닦이 노릇까지 해야 할 판이었다.

극단에서 힘든 일은 항상 내 차지였다. 논산에 도착해 끙끙거리며 트럭에서 무대 장치를 내렸다. 이런저런 소도구까지 챙기다 보면 끼니를 놓치기 일쑤였다. 나는 어둑어둑할 무렵에야 여관에 들어갔다. 단원들은 방에서 화투를 치고 있었다. 두 끼나 굶은 나는 부엌으로 들어가 찬장을 열었다. 그러나 선배들은 나를 그냥 놔두지 않았다.

"삼룡아, 술 한 병 사와라." "삼룡아, 담배 좀 사와라. 너 '백구'라는 담배 아니?" "'공작'이나 '샛별'도 괜찮아. 대신 '풍년초'는 안돼." 나는 찬장 문을 닫고 허겁지겁 송방(충청도에서 구멍가게를 일컫는 말)을 찾아 갔다.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이 방 저 방에 술이며 담배를 아무렇게나 집어 넣었다. "야! 누가 담배를 사오랬어?" "눈깔 사탕을 사오라니까. 당장 이리 안 와?" 선배들의 고함이 터졌다.

그 때 건너편 방문이 열렸다. "야, 물건이 뒤바뀌었으면 알아서 바꾸면 될 것 아냐." 김화자였다. 주연 배우의 한 마디에 단원들은 찍 소리도 못했다. 그녀는 나를 감싸고 돌았다. 그리고 저녁 식사를 했는지도 물었다. 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 입만 열면 울먹일 것 같았다. 그래서 고개만 저었다. "단체에서 끼니는 자기가 알아서 챙겨야 해요. 아니면 굶기가 예사거든요." 김화자는 불쌍한 듯이 나를 쳐다봤다.

나는 세수도 못한 얼굴이었다. 그녀는 "우선 세수부터 하라"고 말한 뒤 부엌으로 들어갔다. 나는 우물에 가서 두레박으로 물을 펐다. 고인 눈물을 훔치며 세수를 했다. 부엌으로 들어가자 김화자는 내게 돈을 건넸다. "어쩌나, 밥이 다 떨어졌네. 이 돈으로 장국밥이라도 사 먹어요. 이런 시골에는 장국밥밖에 없으니까." 6원이었다. 국밥 한 그릇 값. 나는 지금도 그 액수를 잊지 못한다. 주연 배우와 말단 연구생의 지위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였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마움에 가슴이 저미어 왔다.

배삼룡 <코미디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