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아이들 웃음소리 넘치는 마을 만들고 싶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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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샘, 저도 집에 활을 놓고 왔는데요.” “그래, 그래. 이번엔 송암리 차례다. 얘들아, 얼른 갔다 오자.”

‘산골샘’ 윤요왕(39)씨 말에 아이들 서넛이 얼른 윤씨의 1톤 트럭에 올라탄다. 18일 오후 강원도 춘천시 사북면의 별빛지역아동센터. 인근 송화초등학교와 그 병설 유치원의 30명 가까운 마을 아이들이 모두 몰려드는 이 시간이면 센터장 윤씨는 늘 정신이 없다. 그런데 오늘은 더 바쁘다. 매주 수요일은 목공 수업이 있는 날인데, 아이들이 지난 주에 만들다 만 활을 모두 집에 놓고 온 것이다. 모내기 등으로 농가들은 한창 바쁠 때라 윤씨가 직접 아이들을 데리고 이리저리 논길을 달려가 활을 가져오고 있는 참이다. 윤씨는 “내일 비가 온다니 비설거지(비가 오기 전에 농기구 등을 비에 맞지 않도록 치우거나 덮어두는 일) 하고 와야 하는데 꼼짝 못하게 생겼다”면서도 신이 나있는 아이들을 보며 그냥 웃고 만다.

귀농 9년차로 비닐하우스에서 친환경 농사를 짓는 윤요왕씨네 집엔 초등학교와 유치원에 다니는 윤씨의 남매(사진 왼쪽)에 ‘산골유학’ 온 현우(오른쪽)까지, 아이들의 활기가 넘친다. [황정옥 기자]

이곳은 센터가 있는 고탄리를 중심으로 사북면 5개 리 주민 500여 명이 옹기종기 모여사는 산골마을. 춘천시내에서 차로 30분 거리지만, 위성안테나를 달지 않으면 TV도 볼 수 없고 상수도 시설도 안 돼있는 곳이다.

이 마을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는 건 바로 센터에서 아이들이 쏟아내는 웃음소리다. 최근엔 도시에서 ‘유학’ 온 아이들 덕분에 센터가 더욱 북적댄다. 거기엔 마을 주민들의 마음을 한데 모은 윤씨의 역할이 컸다. 센터에서 간식과 식사 등을 담당하고 있는 ‘미소샘’ 신용자(51·여)씨는 “처음엔 윤씨 보고 ‘대학 나온 젊은 외지인이 와서 잘난 척하고 설쳐댄다’고 곱지 않게 보시던 마을 노인들도 이젠 ‘일도 열심히 하고 덕분에 아이들도 많아졌다’며 좋아하신다”고 말했다.

“원래 교육에 특별히 관심이 있었던 게 아니에요. 그저 마을 아이들이 부모는 농사짓느라 바쁘고 학교에는 변변한 방과후 프로그램도 없어 방치되는 걸 보면서 ‘우리 애들 미래가 저렇게 되면 안되겠구나’ 싶어 나서게 됐던 거죠.”

윤씨가 이 마을 새낭골(고성리)에 정착한 건 2003년. 서울과 원주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그는 젊은 나이에도 도시의 삶에 회의를 느껴 귀농을 결심했다고 한다. 고향인 가평 대신 강원대 다니던 시절 농활로 와봤던 이곳으로 왔다. 처음 1년 간은 초등학교 교사인 부인과 아이는 원주에 두고, 이곳에 먼저 귀농해 있던 선배 집에 혼자 머물며 농사일을 익혔다.

“그땐 제 코가 석자라 전혀 주변을 돌아볼 수 없었어요. 그런데 직접 집을 짓고 가족을 데리고 오니까 아이들 문제가 보이더라고요. 아내는 시내 학교에 다니고 저 혼자 비닐하우스 농사를 짓는데, 아이가 유치원에 다녀오면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랐죠.”

그래서 비교적 젊은 학부모들과 합심해 공부방을 운영해보기로 했다. 2005년 여름방학 때였다. 다행히 장소는 학교에 가까운 고탄리 마을회관을 빌렸다. 학부모들에게서 2만원씩 걷은 돈으로 시내에서 강사를 불러왔다. 모처럼 아이들을 안심하고 맡기게 된 농가들은 대환영이었다. 학기 중에도 매일 공부방을 열어달라고 했다. 그렇게 공부방이 이어져 2006년엔 지역아동센터로 등록하게 됐다.

그런데 센터가 안정되니까 이번엔 아이들 수가 줄었다. 윤씨는 그 사이 둘째도 낳았지만, 어느 새 마을에는 귀촌·귀농 가정 외에는 젊은 층이 거의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각한 게 산촌유학이었다. 대안학교와 달리, 도시 아이들이 시골생활을 하면서 공부는 공립학교에서 하는 프로그램이다. 지난해 1학기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했는데, 올해는 송화초등학교 전교생 25명 중 13명이 도시에서 온 아이들이다. “사실 우리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를 살려보자고 시작한 거에요. 그런데 하다보니 도시 아이들에게 얼마나 교육적 효과가 큰 지 알겠더라고요.”

아동센터에서 활 만들기에 열중하고 있는 마을 꼬마의 표정이 진지하다. [황정옥 기자]

기본 숙식은 홈스테이 방식으로 한다. 센터가 선정한 농가에서다. 선택된 농가의 할머니·할아버지들은 어린 아이들을 보며 부수입까지 생겨 좋아한단다. 지난 3월부터 윤씨 집에서 지내고 있는 이현우(5학년)군은 “대전 친구들은 지금 학원에 다니고 있을 텐데 여기선 매일 자연 속에서 친구들과 놀면서 공부할 수 있어 재밌다”며 “아빠 고향이기도 해 더욱 좋다”고 말했다.

센터의 교사 7명 가운데 윤씨와 ‘목공샘’ 송민우(42)씨·‘나무샘’ 이주연(44·여)씨·‘새싹샘’ 정임(47·여)씨 등 5명이 귀촌·귀농인이다. 이 일에 매달리느라 윤씨는 올해 거의 ‘0점 농사꾼’이 됐다. 3300여 ㎡(1000평)의 경작지를 절반 이하로 줄여 토마토만 키우기로 했다. 산골유학 온 아이들을 챙기느라 주말에도 가족끼리 지내기가 어려워지자 아내의 불평도 없지 않다. 하지만 초등학교 2년과 유치원생인 남매가 구김살없이 건강하게 자라고 있는 건 부부에게 싱싱한 희망이다. “이젠 교육전문가들로 귀촌해서 아이들과 자연 속에서 함께 누리는 기쁨을 맛봤으면 좋겠네요.” 윤씨는 센터에서 아이들과 닭곰탕으로 저녁식사를 한 뒤 남매를 데리고 비닐하우스로 향했다. 토마토 모종 마저 심으러.

글=김정수 기자
사진=황정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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