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기구에는 종이 기술자도 일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04면

“야망을 품어야 한다. 우리도 국제금융기구에 적극 진출해 역할(role) 모델을 만들어야 할 때다.”

 허경욱(사진) 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대사는 23일 본지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주요 20개국(G20) 세대인 요즘 젊은이들이 국제금융기구 진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허 대사는 기획재정부가 발간한 국제금융기구 취업 가이드북 『더 넓은 세상을 디자인하는 즐거움, 국제금융기구』의 대표 편저자로 참여했다. 그는 “한국은 개방도가 높기 때문에 국제 질서 안에서 살 수밖에 없다”며 “G20 같은 국가 간 회의 채널을 적극 활용하는 한편, 국제기구에도 많이 들어가 국제적인 규칙(rule)을 만드는 과정에 참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과거에도 국제기구에서 근무하는 한국인은 있었다. 하지만 미약한 국력 탓에 올라갈 수 있는 자리가 사실상 제한돼 있었다. 허 대사는 “이제는 G20 정상회의 이후 위상이 높아진 한국에 더 기회가 많아졌다”고 했다. 게다가 한국에는 교육받은 인재가 많다. 한국 정부도 공적개발원조(ODA)를 늘리며 국제사회에서 발언권을 키우고 있다. 허 대사는 “개발 경험과 외환위기 극복 노하우 등 한국만의 콘텐트가 있다는 것도 강점”이라고 했다.

 국제금융기구 취업을 위해서는 ▶꿈을 높게 잡고(Aim high) ▶전문분야 공부를 많이 하며 ▶영어 구사력보다 국제적인 시야를 더 갖추고 ▶새마을운동 등 한국의 개발 경험도 공부해 두라고 조언했다. 경제·경영학 전공자에게만 기회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컴퓨터 등 다양한 분야의 엔지니어를 원하는 국제기구도 있기 때문이다. 허 대사는 “국제기구에서 일하는 종이 기술자도 만나봤다”고 했다.

 재정부에서 최고 수준의 영어를 구사하는 것으로 유명했던 그였지만 “국제기구에서 일하기 위해서는 영어보다 전문분야 지식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영어는 더듬거리더라도 말하는 콘텐트만 좋으면 괜찮다는 것이다.

 그는 재정부 근무 시절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 등에서 세 차례 일했다. 한국 공무원에 할당된 자리를 찾아간 게 아니라 모두 공개경쟁을 거쳐 선발하는 자리에 도전했다. 허 대사는 “정부 일도 재밌지만 아무래도 관심사가 국내에 치우치다 보니 국제경쟁에서 뒤처지는 느낌이 들었다”며 “그때마다 해외로 나가 자신을 경쟁에 노출시켰다”고 했다.

 언제쯤이면 국제금융기구 수장에 한국인이 오를 수 있을까. 허 대사는 “지금부터 도전해야 한다. 금메달을 따려면 동메달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허 대사는 행시 22회로 관료생활의 대부분을 국제금융 분야에서 보냈다. 관료로선 처음으로 세계은행(IBRD)의 전문가로 공개 채용됐다. 외환위기 직후 재정경제부의 국제기구과장·국제금융과장을 거치면서 대외창구 역할을 했다. 재경부 국제금융국장·국제업무정책관과 청와대 국책과제비서관, 재정부 제1차관을 지냈다.

서경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