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행자를 보호하라” … 자동차 디자인이 변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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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미국의 건축가 루이스 설리번은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Form follows function)”고 말했다. 1982년 제품 디자이너 헬무트 에스링커는 “형태는 감정을 따른다(Form follows emotion)”고 말했다. 그리고 30년 가까이 지난 지금 각국의 자동차 디자이너들을 이런 말을 한다. “형태는 안전을 따른다(Form follows safety).” 안전을 위해 자동차 디자인이 바뀌고 있다는 얘기다.

둥근 전면에 커다란 그릴과 날카로운 램프를 붙인 현대 벨로스터(왼쪽). 전면부의 커다란 라디에이터 그릴이 특징인 아우디 뉴 A8.

사연은 전 세계에서 적용하고 있는 보행자 안전규정에서 출발한다. 이 규정은 자동차가 보행자를 치었을 경우 피해를 최소화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주요 내용은 전면에 범퍼 등이 돌출돼 있으면 보행자의 뼈를 부러뜨릴 수 있으니 튀어나온 것 없이 둥근 공처럼 전면을 다듬으라는 것. 또한 보행자 충돌 사고 시 보행자의 머리가 보닛에 떨어질 수 있으니, 엔진과 보닛 사이에 5㎝ 정도의 간격을 둬서 충격을 흡수하라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이런 규정 때문에 자동차 역사 100년 넘게 툭 튀어나와 있던 범퍼가 매끈하게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요즘 자동차들은 이러한 규정에 맞추며 강렬한 이미지를 내세우기 위해 전면에 커다란 라디에이터 그릴을 붙이고 있다. 아우디의 싱글 프레임 그릴 이후, 범퍼 위 공기흡입구와 범퍼 아래 공기흡입구가 매끄럽게 연결된 자동차가 많이 나왔다. 현대의 벨로스터를 비롯한 쏘나타 하이브리드, 아반떼나 엑센트 등도 대략 이런 형상이다.

 우람한 라디에이터 그릴 양쪽으로 날렵한 헤드램프(전조등)가 유연하게 돌아 나가는 것도 요즈음 자동차 디자인의 특징이다. 헤드램프 부위에 받히는 보행자와 비스듬하게 충돌하면 피해를 줄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보닛과 엔진 사이에 약간의 간격을 두기 위해 전면부가 두툼해지는 것도 트렌드다. 예전에는 날렵해 보이기 위해 보닛을 얇게 낮췄지만, 요즘은 엔진과 5㎝ 정도 위에 보닛을 올려야 해 전면을 두툼하게 디자인할 수밖에 없다.

 전 세계적인 보행자 안전규정 속에서 대부분의 자동차 전면부가 점점 비슷해지고 있다. 이러한 악재 속에서 디자이너들은 기발하고 세밀하게 자신만의 이미지를 만들고 있다. 헤드램프 속에 발광다이오드(LED) 조명으로 특별한 눈매를 만드는 것이 좋은 예다. 한편 전 세계적인 보행자 안전규정과 상관없이 여전히 공격적인 디자인을 내세우는 자동차 회사도 있다. 람보르기니에서 최근 내놓은 아벤타도르는 전면이 뾰족한 살인무기처럼 생겼지만 법적으로는 아직 별다른 문제가 없다. 나라마다 다르지만 생산량이 몇 대 이하인 자동차는 법의 제재를 받지 않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안전이 디자인을 쥐고 흔든 일은 예전에도 있었다. 1980년대 북미 안전규정에 시속 5마일(8㎞) 이하의 충돌에는 전면에 파손되는 부품이 없어야 한다는 규정이 생겼었다. 그 때문에 미국에 수출하는 포니2나 스텔라 등에 육중한 범퍼가 달렸던 적이 있었다. 이때는 돌고래처럼 매끈한 포르셰에도 측면에 돌출 범퍼가 달리기도 했었다.

 자동차에만 이런 규정이 있는 건 아니다. 액정화면(LCD) TV의 경우 전면에서 화면을 밀었을 경우 어느 정도까지는 넘어지지 않고 다시 일어서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지진이 잦은 일본에는 이 규정이 더욱 혹독해 일본 수출형 모델에는 별도로 디자인된 커다란 받침대를 붙이곤 한다.

장진택 자동차칼럼니스트 thetrend@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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