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字, 세상을 말하다] 楓橋夜泊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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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장쑤성 쑤저우(蘇州)에 한산사(寒山寺)라는 절이 있다. 당(唐)대의 기인(奇人) 한산(寒山)의 이름을 딴 사찰이다. 한산은 시(詩)와 선(禪)을 일치시켜 당시(唐詩)의 독특한 경지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50년대 미국 비트 제너레이션이 우상으로 받든 인물이기도 하다. 한산은 원래 부잣집 출신이었다. 그러나 한평생 저장성 천태산(天台山)의 한암(寒岩)에 숨어 살며 세상을 등졌다. 과거 시험에 계속 떨어진 게 ‘죄’였다. 가족 볼 낯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그런 아픔과 번민을 삭이고 삭인 끝에 세속을 초탈한 그만의 시풍을 남겼다.

그 절 안에 청(淸) 말의 저명 학자인 유월(兪<6A3E>)의 필치로 쓰여진 시비(詩碑)가 있다.
‘달 지고 까마귀 울며 하늘엔 서리 가득한데(月落烏啼霜滿天) 강가 단풍나무와 고기잡이 배 등불은 마주한 채 시름 속에 졸고 있구나(江楓漁火對愁眠) 고소성 밖 한산사(姑蘇城外寒山寺) 한밤 중 종소리가 객선까지 들리누나(夜半鐘聲到客船)’

당(唐)대 시인 장계(張繼)가 지은 ‘풍교야박(楓橋夜泊)’이다. 늦가을 새벽, 지은이의 처연한 한숨이 들리는 듯하다. 청(淸)나라 강희제(康熙帝)가 이 시에 이끌려 일부러 풍교(楓橋)를 찾았을 정도다. 장계는 이 한 수로 중국 역대 유명 시인의 반열에 올랐다. ‘풍교야박’ 또한 장계가 과거에 낙방한 뒤 고향으로 돌아오는 배 안에서 지은 것이다.

탈락의 아픔은 곧잘 새로운 역사를 쓰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청(淸)대에 태평천국(太平天國)을 세운 홍수전(洪秀全)의 저항의 힘 역시 과거 낙방에서 기인한다. 세 번째 과거시험에 실패한 그는 충격 속에 열병을 앓는다. 열병으로 신음하던 그의 꿈 속에 나타난 노인은 그에게 지상의 악마를 퇴치하라고 말한다. 그가 네 번째 과거에 떨어진 뒤 ‘모든 이는 신의 아들로서 평등하다’고 외치며 태평천국을 세우게 되는 계기다.

우리 사회가 ‘탈락’ 게임에 도취돼 있다. 아나운서 채용 과정에서의 낙방자를 매주 TV로 공개한다. ‘나는 가수다’ ‘위대한 탄생’ 등은 ‘국민의 선택’이라는 이름까지 들먹이며 탈락자를 세상에 알린다. 그들 수많은 낙방자의 아픔은 과연 어떤 힘으로 부활할 수 있을까.

유상철 중국연구소 소장 scyo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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