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커들 이젠 ‘추억까지 테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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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지금 빨리 미니홈피 좀 봐. 누가 언니 사진첩을 하나하나 지우고 있어!”

 경기도 성남시 분당에 사는 신모(34·여)씨는 지난 5일 황당한 일을 당했다. 동생이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 미니홈피가 지워지고 있다고 전한 것이다. 동생은 이날 오후 3시30분쯤 언니가 네이트온 메신저에 접속해 갑자기 “500만원만 송금해 달라”고 말을 걸자 이상하게 생각했다. 언니가 바쁘게 일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또 상대방의 한국어도 서툴렀다. “이따 집에서 보든지 전화로 얘기하자”고 대답하는 순간 대화창에 욕설 세례가 쏟아졌다. 놀란 동생이 메신저와 연동된 언니의 미니홈피에 들어가 봤더니 사진첩과 일촌평이 하나씩 지워지고 있었다. 순식간에 사진 1만여 장과 일촌평이 모두 사라졌다. 중국인으로 추정되는 해커가 신씨의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도용해 메신저 피싱을 시도하다 실패하자 보복성 범행을 저지른 것이다.

 네이트온 메신저로 접속한 뒤 연동된 미니홈피에 들어가 사진첩·일촌평 등 데이터를 삭제하는 새로운 사이버 범죄 수법이 등장했다. 하나의 아이디·비밀번호로 두 가지 서비스에 접근 가능하다는 점을 악용한 2차 범죄다. 싸이월드와 네이트온을 운영하고 있는 SK커뮤니케이션즈는 “약 한 달 전부터 메신저 피싱이 미니홈피 피해로 이어졌다는 신종 수법 신고가 접수되고 있다”고 밝혔다.

 이 같은 ‘사진첩 테러’는 피해자들에게 금전적 손실 못지않은 상처를 남긴다. 지난달 29일 비슷한 피해를 본 대학생 김지훈(23·홍익대 경영3)씨는 “고1 때부터 쌓아 온 추억들이 몽땅 날아가니 화가 나고 막막했다”며 당시 심경을 전했다. 김씨는 이후 매일같이 친구와 선후배 미니홈피를 돌아다니며 ‘추억 복원’을 하고 있다. 다른 사람 홈피에 사라진 사진들이 남아 있나 살피고 사진이 보이면 퍼나르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신씨도 피해 다음 날 오전 3시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돈을 훔치는 데 실패한 해커가 추억을 대신 훔쳐가 버렸다”며 “10년간의 추억을 다시는 복구할 수 없게 돼 돈을 잃은 것만큼 속상하다”고 했다.

 운영업체 측에서는 “복구방법이 없다”는 입장이다. SK커뮤니케이션즈 관계자는 “정상적으로 아이디·비밀번호를 입력해 로그인한 뒤 홈피 내용을 변경하면 회사 입장에서 손대기 어렵다”고 말했다. “개인의 공간에 담긴 사적인 정보에 관리자가 임의로 접근하는 건 옳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피해자들은 “요청한 사람에 한해 범죄 피해 사실을 확인한 뒤 데이터 복구 서비스 제공 등 구제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호소한다. 이에 대해 김씨는 “금전적 피해를 보지 않아 막상 경찰에 수사 의뢰는 못 했다”며 “주요 자료를 자동 백업하는 기능이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경찰청 사이버수사대에 따르면 최근 6개월간 메신저 피싱 처벌 건수는 185건이다. 김씨처럼 실제 신고하지 않은 경우를 합치면 피해 건수는 더 많아진다. 메신저 피싱에 아이디가 도용된 경우 금전적 피해를 보지 않더라도 범인에게는 사기미수 등의 혐의가 적용된다. 경찰 관계자는 “메신저 피싱은 예전보다 피해금액이 커지고 수법은 더 정교해지고 있다”며 “이 과정에서 미니홈피를 훼손하는 사이버 범죄 사건도 늘어나고 있는 추세”라고 말했다.

심새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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