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백화점이 허영의 전시장? 내겐 삶의 허기를 채워주는 ‘낙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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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백화점
그리고 사물·세계·사람
조경란 지음, 톨
373쪽, 1만3800원

여성들은 왜 백화점을 사랑하는 것일까. 질문을 바꿔, 왜 백화점 산업은 갈수록 승승장구 번창일로를 달리는 것일까.

 ‘삐딱한’ 사회과학자들은 대체로 백화점 산업에 대해 부정적이다. 그들에게 백화점은 상품에 대한 욕심을 끝없이 확대 재생산하는 ‘욕망의 전시장’일 뿐이다. 이뿐인가. 같은 상표의 백화점 상품을 구매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은밀한 동류의식마저 싹튼다. 이 경우 상표는 사용자의 사회·경제적 계급을 드러내는 표지가 된다.

조경란씨의 『백화점』은 현대인의 쇼핑심리, 백화점에 얽힌 추억 등을 녹여낸 에세이다. 조씨는 “소설 쓸때처럼 잘 쓰려고 조바심 내지 않다 보니 오히려 만족스러운 글이 나온 것 같다”고 했다. [김상선 기자]

 이쯤에서 한 번 냉정하게 생각해보자. 과연 백화점은 앞서 언급한대로 부정적이기만 한 것일까. 빈익빈 부익부, 양극화의 선명한 사례로 백화점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 한 켠에 은근한 동경과 질시의 마음이 깔려있지는 않은가. 어느 정도 속물인 우리들은 겉으로는 비싸다고 욕하면서도 속으로는 백화점 상품을 사랑하지 않나.

 이런 궁금증과 상념에 대해 성실하면서도 솔직한 답변을 제시한 책이다. 어느덧 ‘젊은’이라는 형용사보다 ‘중견’이라는 수식어가 자연스럽게 된 소설가 조경란(42)씨가 썼다.

 혹시라도 책이 불러 일으킬 수 있는 논쟁에 대한 조씨의 입장은 명확하다. “백화점을 좋아하지 않는 분들이 굳이 내 책을 읽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조씨는 대신 “가질 수 없는 상품으로 인해 고통 받고 소외감을 느끼다가도 어렵게 원하는 상품을 얻었을 때 기쁨을 느끼고 예찬하는 분들에게 책을 추천하고 싶다”고 했다.

 책은 분류하자면 백화점을 주제로 한 산문집이다. 하지만 ‘그리고 사물·세계·사람’이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화제가 ‘비좁은’ 백화점 안에 갇히지 않는다.

 이런 식이다. 백화점에서 자신이 애용하는 ‘미소페’ 브랜드 구두를 수선한 에피소드를 소개하다가 하이힐의 유행 역사를 훑고, 어린 첩의 발에 매혹 당한 노인을 소재로 한 일본 작가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단편 ‘후미코의 발’ 등으로 얘기가 건너뛴다. “소비는 자신을 보상해주는 순간적인 놀이”라는 서양 사회분석가의 이론을 소개하고 ‘소비사회’라는 용어의 기원도 들려준다. 여기에 다시 조씨 자신의 체험을 덧붙인다. 지독한 외로움, 상실감 등을 백화점 쇼핑을 통해 순간순간 이겨냈던 이야기 등등.

그림=노준구

 제목 백화점만큼이나 책이 다루는 내용은 만물상 자체다. 아련한 향수 없이 떠올리기 어려운 우리 근대의 초창기 풍경, 모던 보이와 모던 걸들이 활보하던 1930년대 경성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아케이드, 만국박람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백화점의 역사도 나온다. 소설가라는 본업을 잠시 접은 후 작심하고 쓴 듯한 ‘백화점 잡학사전’ 같다. 이런 내용이 ‘1F(1층)’부터 ‘10F’를 거쳐 ‘B1F’, 즉 지하층 식품매장까지 백화점 층수를 따른 11개 장(章) 에 나뉘어 촘촘히 담겨 있다. 작가는 “목차를 보고 끌리는 채프터(chapter) 어디에서나 읽기 시작해도 상관 없는 책”이라고 말했다. 쇼핑하듯 부담 없이 읽으라는 주문이다.

 『백화점』은 조씨에게 열두 번째 책이다. 1996년 등단 이후 그는 누구보다 성실하고 치열하게 소설을 써왔다. 왜 그는 생뚱맞게 백화점 산문집을 쓴 걸까. 의문은 책장이 넘어가며 자연스럽게 풀린다.

 우선 그는 “사람이 모인 장소에서 약간의 서비스를 받고 싶을 때” 백화점을 찾는다. 자주 찾다 보면 관심이 생기기 마련. 보다 절박한 이유는 백화점이 조씨 삶의 주요 고비마다 훌륭한 의지처가 됐기 때문이다. 대학 진학에 실패하고 극도의 무기력증에 빠져 있던 20대 초반, 문학을 하라는 ‘신비로운’ 계시를 받은 곳이 다름 아닌 백화점이었다. 30대 초반 첫 실연을 당한 후 지하철 2호선 순환 열차를 타고 돌며 눈물을 흘릴 때 허기를 달래기 위해 찾은 곳 역시 소란함 속에 익명이 보장되는 백화점 식당가였다. 이런 사적인 사연이 숱하게 녹아 있다 보니 책은 밋밋한 잡학 사전을 훌쩍 뛰어넘는다.

 조씨는 “백화점은 살 수 없는 물건들 때문에 느끼는 소외감을 오히려 즐길 수 있고 상품에 대한 자신 만의 취향이 있으며 걷고 보고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더할 나위 없는 장소”라고 말했다.

  단 여기에는 전제가 붙는다. 꿈과 자신감으로 충만해 소외감을 이겨낼 수 있고, 스스로의 분수를 명심해 ‘지름신’의 유혹을 견뎌내야 한다. 분수껏 지출한다면 백화점은 상품과 휴식은 물론 문화까지 덤으로 얻는 ‘인공낙원’이라는 것이다. 소설가의 눈썰미와 글 솜씨로 인문학적 냄새 솔솔 풍기는 저술을 버무려낸 드문 사례가 아닐까 싶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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