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진정한 상생’ 이런 갑을 관계도 있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11면

롯데백화점 연창모 상품기획자와 청계영농조합

매장 내주고 수출길 터주고
2억이던 매출이 31억 ‘훌쩍’

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 본점 식품관에서 청계영농조합의 김기상 차장(왼쪽)과 롯데백화점 연창모 농산물 선임상품기획자가 상품(표고버섯)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유명 백화점과 거래하고, 일본·대만 등으로 우리 농산물을 수출하는 것은 전국 영농조합법인들의 꿈이다. 농산물의 우수성을 인정받아야 할 뿐 아니라 포장·배송까지 웬만한 수준에 올라야 하기 때문이다. 전남 장흥의 버섯 재배 농가가 모여 만든 청계영농조합법인은 그 꿈을 이룬 곳으로 꼽힌다. 청계영농조합은 1998년만 해도 겨우 농가 7가구가 속한 전형적인 영세 영농조합이었다. 건표고(말린 표고버섯)를 일본에 수출하기도 했지만 국내 시장 판로가 없었다. 중국·북한산처럼 저가 버섯까지 유통돼 어려움은 커져 갔다. 농민들은 머리를 맞대고 궁리를 했지만 뾰족한 답은 찾지 못했다. 기회는 우연히 왔다.

 질 좋은 버섯이 있다는 소식을 우연히 접한 롯데백화점 연창모(44) 상품기획자가 찾아온 것이다.

 연 기획자는 “버섯을 본 뒤 이거다 하는 기분이 들었다”며 “회의적인 분위기가 많았지만 제품력에 확신이 있는 만큼 강하게 입점을 밀어붙였다”고 말했다. 연 기획자는 이 지역 농민들과는 아무런 연고가 없는 사이였다.

 어렵사리 백화점에 입점하자 고객들로부터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저가 버섯 시장은 포기하는 대신 고가 선물용 시장을 주요 타깃으로 삼는 전략을 썼다.

 입점 첫해인 2002년 2억원 선이던 청계영농조합의 매출은 2007년에는 31억원까지 올랐다. 연 기획자가 단순히 입점에만 도움을 준 것이 아니다.

 소비자들이 다양한 상품이 들어있는 ‘복합형’ 선물세트를 선호한다는 점을 감안해 세트 상품을 지속적으로 출시하도록 조언도 했다.

 입소문이 나면서 다른 백화점과 대형마트의 입점 문의도 빗발쳤다. 일본 오사카와 대만 등으로 수출 시장 다변화도 이뤄냈다. 청계영농조합 선옥규(68) 회장은 “백화점과 거래하는 우수한 영농조합이라는 타이틀이 생기면서 정부로부터 15억4000만원의 지원금도 받았다”며 “버섯밖에 모르고 살았는데, 처음으로 경영이라는 걸 알게 된 때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사업 규모가 갑자기 커지면서 어려움도 찾아왔다. 2007년 산지유통센터를 세우는 데 부담금 10억원이 들고, 상품수매비용과 포장기술 개발에 돈을 쏟아 부은 것이 화근이었다. 버섯 종자 수매 비용을 내지 못할 만큼 자금난이 찾아 왔다. 조합원들 사이에선 ‘이러다 망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까지 나왔다. 선 회장은 “기술과 제품은 있는데 돈이 없어 쩔쩔매던 시절”이라고 회고했다.

 이때 롯데백화점이 또다시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유동성 위기에 빠진 영농법인에 2009년 8월부터 지난 5월까지 총 네 차례에 걸쳐 10억원의 자금을 지원했다. 청계영농조합은 이를 시설투자와 버섯 종자 수매 자금으로 활용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발판으로 삼았다. 연 기획자는 “청계영농조합의 실력과 성실성을 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현재 청계영농조합은 전국의 롯데백화점 점포 7곳에서 상설 매장을 운영 중이다. 지난해 롯데에서만 25억원어치를 판 것을 포함해 총 90억원대의 매출을 올렸다. 조합원 수도 20가구로 세 배가량 늘어났다. 선 회장은 “롯데백화점이 식구처럼 조언해 주고 경제적인 도움까지 준 덕에 여기까지 왔다”며 “조합원들과 앞으로도 더 좋은 버섯을 만들어 백화점의 대표 상품이 되자고 다짐했다”고 말했다.

이수기 기자

신세계백화점 이종묵 상무와 일광수산

부도 맞자 등 돌린 중매인
바닷가 달려가 대신 설득

서울 충무로 신세계백화점 본점 식품관에서 이 회사 이종묵 상무(오른쪽)와 일광수산 정한수 대표가 굴비를 들어 보이고 있다. 지난해 부도가 났던 일광수산은 18일 기업회생 인가결정을 받았다.


수산물 가공업체 일광수산은 2010년 3월 1차 부도를 맞았다. 수십 년간 거래하던 거래처 10여 곳은 모두 등을 돌렸다. 두 달 뒤 회사는 최종 부도 처리됐다. 정한수(54) 사장은 술로 날을 지새우며 자살을 고민했다. 이때 도움의 손길이 나타났다. 이 회사의 납품을 받아온 신세계백화점의 식품담당 이종묵(48) 상무였다. 그로부터 딱 1년이 지난 18일 일광수산은 채권단으로부터 기업회생 인가결정을 받아내며 재기에 성공했다.

 일광수산은 신세계백화점과 1973년부터 거래를 해왔다. 한창 잘나갈 때에는 신세계백화점에서 판매하는 굴비의 70~80%가 이 회사 제품이었다. 2008년 매출은 250억원을 기록했다. 이 상무는 89년 신세계백화점에 입사 이래 줄곧 수산물 담당을 맡아왔다. 신입사원 시절부터 잘나가는 거래업체 사장인 정 대표와 종종 소주잔을 나눴다.

 일광수산에 위기가 찾아온 것은 2008년. 공장을 분당에서 경기도 이천으로 이전했지만 기존 분당공장이 팔리지 않으면서 금융비용 압박이 커졌다. 소비자들이 비싼 국내산 굴비를 외면하면서 어려움은 더 커졌다.

 정 대표는 “그동안 큰 어려움을 겪지 못해 자만했던 게 가장 큰 원인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위기가 왔지만 별다르게 손을 쓰지 못했다. 사업 다각화를 위해 굴비 외에 다른 수입 냉동가공수산물도 취급했지만 되레 손해만 보았다.

 부도를 맞고 고심하던 정 대표를 이 상무가 찾아왔다. 그는 “이대로 주저앉을 순 없다”고 정 대표를 붙잡았다. 그는 “20년 넘게 함께 웃고 울던 회사가 일순간에 무너진다는 소식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당장 급한 것이 산지 중매인들을 설득하는 일이었다. 정상적으로 조기를 들여와야 이를 가공해 굴비로 만들어낼 수 있어서다. 하지만 부도설이 돌자 산지에서는 일광수산에 대한 납품을 거절한 곳이 대다수였다.

 이 상무는 10여 차례 여수·목포 같은 조기 산지에 내려가 산지 중매인들을 직접 만났다. 그는 “신세계가 책임지고 사들이겠다”며 안정적인 지원과 매입을 약속했다.

  대형 유통회사 담당 임원이 다녀갔다는 소문은 일광수산에 큰 도움이 됐다. 납품을 거절하던 이들도 점차 일광 쪽에 물건을 대기 시작했다.

 때마침 신세계는 협력업체와 상생을 강조하고 있었다.

 자체 동반성장 프로그램을 통해 부도 직후의 일광수산에 지원금(3억~5억원)을 수차례 보냈다. 신세계백화점이 98년부터 일광수산에 지원한 금액은 80억원에 달한다. 이 상무가 직접 일광수산의 채권자인 금융회사를 찾아가 “최선을 다 할 테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부탁도 했다.

 자금 지원뿐 아니라 상품 경쟁력을 강화하는 데에도 도움을 줬다. 우선 대목인 명절을 겨냥해 선물용 패키지 개발을 지원했다. 굴비에 디자인 개념을 도입했다. 이 상무는 또 일광수산의 공장(냉장·냉동)시설이 비어 있다는 것을 알고 냉동창고로 임대해 활용할 수 있도록 거래업체를 소개했다.

 신세계백화점을 통해 국내에 처음 도입되는 뉴질랜드 수산물 업체의 한국 파트너로 일광수산을 추천한 이도 그였다.

 정 대표는 “흔히 거래의 갑을관계라고 하면 착취와 피착취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지만, 바로 그 ‘갑’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며 “좋은 제품으로 꼭 은혜에 보답하겠다”고 말했다.

이수기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