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50대 직장인 인터넷 '블랙홀'세대

중앙일보

입력

H그룹 K이사(51)는 요즘 초조하고 불안해 밤잠까지 설친다. 이번주 초 열린 사업담당 회의에서 과장이하 직원들이 인터넷 비즈니스를 얘기하는데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한 뒤 생긴 현상.

그는 이날 회의에서 괜히 입을 뻥긋했다가 실수하면 자신의 무지가 드러날까봐 평소와 달리 한마디도 못했다.

그 전날 임원회의에서도 그는 사장 등 최고경영자들이 의외로 인터넷 비즈니스에 해박하다는 점을 보고 깜짝 놀랐다. 최고경영자와 아래 직원들은 저만큼 앞서가는데 혼자 외딴 섬에 고립돼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P부장은 승진은 고사하고 ''조기퇴직 1호'' 로 낙인 찍힐까봐 노심초사하고 있다. 지난 2주 동안 1시간 일찍 출근해 인터넷 소개 책자를 들여다 보고, 아래 직원에게 물으며 열심히 배우려 했지만 쉽지 않아 그만뒀다.

요즘 급변하는 e-비즈니스.디지털 경영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이같이 ''인터넷 쇼크'' 로 고민하는 기업체의 중간간부가 많다. 40~50대 연령층으로 부장~임원급인 이들은 이른바 ''블랙홀 계층'' 으로 불린다.

전문가들은 블랙홀 계층이 전체 직장인의 20%선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상용 근로자 6백 5만명(1999년말 기준) 가운데 약 1백만명이 이런 부류라는 것이다.

◇ 겉도는 샌드위치 세대

이들은 과거 전통적인 산업환경에서 리더십을 발휘하는 ''중대장·대대장'' 으로 기업을 성장시켰다. 그런데 정보화와 지식산업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조직내 위상이 약화되고 있다.

전하진 한글과컴퓨터 사장은 "얼마전까지만 해도 상사한테 정보가 집중돼 이를 무기로 피라미드형 구조의 조직 운영이 가능했는데 인터넷 혁명에 따른 정보의 공유·평등화로 상황이 달라졌다" 며 "부장·임원이 되레 부하직원보다 정보가 취약해 통제력과 설 자리를 잃고 있다" 고 진단했다.

블랙홀 계층은 90년대초 기업에서 컴퓨터 활용이 늘어나기 시작했을 때 나온 ''컴맹'' 장벽은 기능적인 문제라 그럭저럭 넘겼는데, 최근의 e-비즈니스 환경은 질적인 내용이라 따라잡기가 쉽지 않다고 호소한다.

더구나 이 연령층은 직장을 잃으면 재취업이 어렵다. 이들은 20대 후반~30대인 아래 직원들이 인터넷.벤처 업체로 옮기면서 수억~수십억원대의 스톡옵션(주식매입선택권)을 받는다는 소리에 무력감을 느낀다.

사내에서 인센티브제를 적용받는 일부 직원들이 자신보다 많은 돈을 받는 것을 보면서 허탈감에 빠지기도 한다.

◇ 상실감 극복 방법

전국경제인연합회 최정기(崔頂基)고용복지팀장은 "정부의 노동정책이 미취업자 중심이라 기존 취업자에 대한 정보화교육은 엄두도 못내는 실정" 이라며 "기업내 재교육과 함께 개인차원의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고 지적했다.

현대·삼성·LG 등 대기업은 간부급에 대한 교육을 서두르고 있지만 중견기업 이하는 대부분 여력이 없다.

강북신경정신과의원 황광민 박사는 "인터넷 비즈니스와 벤처 열풍의 이면에는 한탕주의라는 집단적인 최면의식도 깔려 있다" 며 "그동안 자신이 믿어온 삶의 가치가 소중하다는 확신을 갖고 자신의 일에 대해 자긍심을 가져야 허무와 무력감을 극복할 수 있다" 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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