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수입했지만 경영은 수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전자제품은 이제 사용자의 감성까지 만족시킬 수 있는 디자인과 품위를 추구해야 한다.”

인천 남동공단에 위치한 기신정기 윤현도(45) 대표이사의 진단이다. 이 회사는 1988년 일본의 금형소재와 형광표시관 전문기업인 후타바전자공업과 합작으로 설립됐다. 23년째 국내 몰드베이스 시장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다. 몰드베이스는 금형 틀을 만드는데 필요한 소재. 금형과 또 다른 차원의 정밀한 기술이 필요한 분야다.

윤 대표는 서강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LG반도체 메모리 개발부서 선임연구원으로 근무했다. 그는1997년 외환위기로 LG반도체와 현대전자가 합병할때 회사를 그만 두고 부친 회사에 입사해 경영을 물려받은 2세 기업인이다. 부친 윤종수(76) 회장은 1975년 기신산기를 설립해 국내 최초로 표준 몰드베이스를 공급했다. 윤 회장은 전량 수입에 의존하던 몰드베이스의 원재료인 후판 강재를 포스코와의 협력으로 국산화한 장본인이다. 윤 회장은 지금도 일주일에 두세 번 출근해 경영에 조언을 한다.

윤 대표는 “새로운 사업을 위해 나름대로 데이터를 분석해서 경영하지만 창업자이신 부친의 ‘사업 감각’은 못 당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부친의 오랜 경륜은 사업이 어려움에 봉착할 때마다 큰 힘이 된다”고 말했다. 그는 대표이사 취임 이태 후 중형 몰드베이스를 생산하는 삼일메가텍을 인수했다.

그는 당초 이 회사를 인수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수많은 협력업체 중 한 곳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 가이드 핀을 납품하던 이 회사가 기신정기처럼 몰드베이스 생산에 나선 것. 윤 대표는 상대적으로 중소형에 국한돼 있던 기신정기의 제품라인업 보완 등 시너지 효과를 감안해 이 회사를 합병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그는 “합병의 많은 변수들이 걸림돌이 됐다. 고비마다 부친의 도움으로 일을 풀어나갔다”고 말했다. 그는 2008년 중국 텐진에 후타바사와 합작으로 현지법인을 설립해 화북 지역 시장을 공략할 수 있는 거점도 구축했다.

일본 기업과의 합작사업에 대해서 윤 대표는 “일본 기업의 특징은 오너가 있지만 중요한 의사 결정을 이사회가 한다”며 “이는 오너의 독단에 따른 실수를 줄일 수는 있지만 그 결정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말했다. 그는 돌다리도 바로 안 건너고 누군가 먼저 건넌 뒤에 건너는 것이 일본인의 습성이라고 덧붙였다. 그 때문에 한국인의 과감하고 다이내믹한 성격과 보완하면 최상의 파트너가 될 수도 있다는 것. 후타바는 기신정기의 지분을 61.4%나 보유하고 있지만 일본에서 파견한 인원은 단 한 명도 없다.

기술은 '수입'했지만 경영은 '수출'했다. 그는 “합작을 통해서 제조기술을 일본에서 배웠지만 경영 능력은 오히려 일본 합작회사에서 벤치마킹을 할 정도”라고 말했다. 이 회사는 서울·대구·부산 등 3개의 영업소를 통해 전국에 직접 판매를 하고 있다. 그는 “직판은 유통마진을 줄여서 가격경쟁력을 높이고 고객의 소리를 듣고 바로 제품이나 판매정책에 반영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말했다. 이 같은 시스템을 눈여겨 본 후타바사 역시 본사에서 떨어져 있던 영업본부를 공장으로 이전했다.

자고나면 새 모델이 나올 정도로 휴대전화는 디자인의 변화가 심하다. 이 회사의 경쟁력은 납기를 최대한 줄였다는 점이다. 윤 대표는 “우리는 주문에서 납기까지 3일이면 된다”고 말했다. 수주에서 제품 출하까지 완전 전산화한 유연생산시스템(Flexible Manufacturing System)를 갖춘데다,150대에 달하는 정밀가공 기기들을 주야로 가동하기 때문이다.

프레스 금형용 다이세트는 1분당 1천회 이상의 왕복운동을 하기도 하며, 몰드베이스도 보통 10만회 이상의 왕복운동을 한다. 판재에 가공된 홀과 핀 사이에 마찰이 심한 것이다. 이 때 핀이나 홀 가공의 정밀도가 떨어지면 금형으로 찍어 낸 물건의 품질이 조잡하거나 불량품이 생긴다. 따라서 자동차의 엔진 가공에 버금갈 정도의 정밀한 보링가공 기술과 노하우가 제품의 핵심기술이다. 이 회사는 이미 반세기에 거쳐 금형부품을 제조해온 후타바사에서 이러한 제조 기술과 노하우를 전수 받았다.

이 회사는 미크론 단위 공차를 따지는 초정밀 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 대당 10억원을 웃도는 스위스제 지그 그라인더 등 초정밀 가공설비들을 활용한다. 이 때문에 반도체의 리드프레임·소형 커넥터·2차 전지용 캔 등의 정밀 프레스금형 수요에도 대처할 수 있게 됐다. 이 회사는 향후 40인치 이상으로 대형화될 LCD TV나 고품위 가전제품· 자동차 등의 대형 금형 수요에 발맞춰 중대형 몰드베이스 생산라인을 구축 중이다. 올 하반기에 생산을 본격화할 예정이다. 이 회사는 삼성전자를 비롯해 3000개 기업에 납품하고 있다. 국내 시장점유율은 60%선(중소형 몰드베이스 기준)이다. 종업원 430명이며, 지난해 855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이봉석 기자 lbsok@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