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 이슈] 순수 시신 기증 늘어 이젠 선진국 수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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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8일 오후 서울 안암동 고려대 의대 감은(感恩)탑 광장에서는 시신 기증자의 뜻을 기리기 위한 감은제가 열렸다. 이 학교 해부학교실 엄창섭 교수는 기증자를 한 명씩 거명하며 고인을 추모했다.

엄 교수가 '고(故) 정용후 님'을 호명하자 광장 한쪽에 있던 미망인 박순우(71)씨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정용후 전 공군참모총장은 지난해 5월 숨지면서 시신을 기증했다. 박씨는 "후학을 위해 좋은 일 하자는 게 남편의 뜻"이었다고 말했다.

의대생 대표 14명의 헌화로 막을 내린 이날 행사에는 최근 1년간 시신 기증자의 유가족 등 60여 명이 참석했다.

의학 발전을 위해 자신의 몸을 기증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장기기증을 약속하는 사람이 크게 늘고, 뇌사(腦死)자의 장기 기증도 2003년부터 증가하고 있다. 시신.장기 기증에 대한 국민의 인식이 서서히 바뀌면서 기부의 한 유형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것이다.

시신 기증자가 늘면서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의대생들이 실습을 충실하게 할 수 있게 됐다. 일부 대학에서는 의사들이 기증한 시신을 임상시험에까지 활용하고 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시신 기증자가 적어 의대생 가운데 해부학 실습을 제대로 못한 채 의사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 늘어나는 기증자=고려대 의대에 시신을 기증한 사람은 94년 15명에 불과했지만 지난해에는 58명으로 늘어났다. 연세대 의대는 지난해 74명으로부터 시신을 기증받았다. 이 학교 관계자는 "10년 전의 두 배나 된다"고 밝혔다. 서울대.가톨릭대 의대 등도 비슷한 상황이다. 이에 따라 서울과 일부 수도권 의대생들은 4~5명이 한 구의 시신으로 실습하고 있다. 90년대에 의대생 8~16명당 한 구의 시신이 배정돼 한 조는 해부, 다른 조는 참관하던 것과 대조적이다. 연세대 의대 이혜연 교수는 "이 정도면 선진국 수준"이라며 "기증자가 넘쳐 지방 거주자는 인근 대학에 기증해 달라고 권유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기증자가 늘어나면서 시신을 임상시험에 활용하기도 한다. 지난해 고려대 의대에 기증된 시신 58구 중 10구는 의사들의 임상시험용으로 배정했다. 이 학교 해부학교실 엄기천씨는 "90년대에는 시신을 임상시험에 사용하는 것은 꿈도 못 꿨다"고 말했다.

국립장기이식관리센터에 등록한 장기기증 희망자도 2000년 3498명에서 2002년 1만8782명, 지난해에는 2만4101명으로 매년 급증하고 있다. 2000년 2월부터 정부가 장기 이식을 관리하면서 장기를 기증한 뇌사자가 99년 162명(장기이식 435건)에서 2002년에는 36명(167건)으로 줄기도 했다. 그러나 2003년 68명(285건), 2004년에는 86명(363건)으로 늘어나는 추세다. 살아있는 사람의 장기를 이식한 경우도 2000년 1144건에서 2004년 1695건으로 증가했다.

◆ 달라지는 기증동기 =변길자(62.여.경기도 안양시 비산동)씨는 93년 신장을, 2003년 8월 간을 기증했다. 이에 앞서 92년에는 시신기증 서약을 했다. 변씨의 남편 전병선(2002년 사망당시 67세)씨도 95년 시신기증에 서약했고 사망 후 한양대 의대에 기증했다.

변씨는 "내가 살아오면서 가난과 병마에 시달린 적이 있어 고통받는 사람들을 생각해 장기를 기증했고, 시신 기증도 약속했다"고 말했다. 최근 전북대 의대에 시신 기증 서약을 한 김철한(63.전주시 덕진구)씨는 "의사의 판단 착오로 오진한 경우를 보고 기증을 결심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처럼 기증 동기도 과거와 많이 달라졌다. 사랑의 장기기증운동본부 최승주 사무국장은 "90년대까지만 해도 시신 기증자의 대부분이 무연고자나 행려병자였고, 장기를 기증할 경우 금전적 보상을 바라기도 했지만 지금은 대부분이 남을 위한 순수한 뜻에서 기증한다"고 말했다.

기증 문화가 바뀌고 있다고는 하지만 정작 시신 기증자 가족들의 마음이 편한 것만은 아니다. 변씨의 아들 전성호(36.학원강사)씨는 "부모의 몸을 훼손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어머니의 고귀한 뜻을 배워야겠다"고 말했다. 시신을 기증할 경우 장례식장을 무료로 사용하는 정도의 지원밖에 없다. 장기를 기증하면 위로금 200만원, 장례보조비 200만원 등 600만~800만원을 정부와 병원에서 받는다.

신성식.이충형 기자

장기 기증 더 늘리려면…뇌사 판정 절차 더 간소화 해야

시신 기증자가 늘고 있지만 주로 서울에 편중돼 있고, 장기 기증은 수요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기증의 중요성을 적극 홍보하고 까다로운 뇌사판정 절차를 완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방 의대는 여전히 부족=지난해 지방 W의대에 기증된 시신은 18구였다. 지난해는 다른 해(평균 10~12구)에 비해 기증자가 많았다. 이 학교에서 의대는 시신 한 구당 16~18명, 치대와 한의대는 35명의 학생이 실습한다. 지방 국립대인 J대는 연평균 30구를 기증받는다. 사립대에 비해 사정이 좀 나은 편이지만 서울 소재 대학에 비하면 절반에도 못 미친다.

원광대의 한 교수는 "시신이 부족해 학생 실습, 교수들의 임상실험이 힘들어 일부 교수는 서울의 대학으로 '원정'을 가기도 한다"고 말했다. 강릉대 치대 이희수 교수는 "수도권에 인구가 몰려 있어 아무래도 기증자가 수도권에 많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2003년부터 뇌사자가 늘고 있지만 아직 장기수요를 충족시키지는 못하고 있다. 장기를 이식 받기 원하는 환자가 2000년 7022명에서 2004년 1만3100명으로 크게 늘면서 병세가 심각한 환자들은 중국으로 건너가기도 한다.

삼성서울병원 장기기증 코디네이터 홍승희 간호사는 "특정 병원이 뇌사자를 찾아내더라도 그 사람의 장기는 정부가 순서에 따라 지정해 주는 병원으로 돌아간다"며 "따라서 병원들이 적극적으로 뇌사자를 찾지 않게 되는 데다 뇌사 판정 절차가 너무 까다로운 게 장기기증의 걸림돌"이라고 말했다.

◆외국은 어떤가=우리나라 인구 100만 명당 장기기증자는 1.4명에 불과하다. 스페인(32.5명) . 미국(22.1명) . 프랑스(17.8명) . 이탈리아(17.3명) . 영국(10.9명) 등에 비해 매우 적다. 미국의 경우 비영리법인인 장기구득기구(OPO) 60개가 뇌사자 가족을 설득해 장기기증을 유도하는 일을 전담하고 있다. 우리는 장기기증을 정부가 주도하면서도 홍보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미국.영국.일본.네덜란드 등은 운전면허증에 장기 기증 의사나 기증할 장기의 종류 등을 기재하고 있다.

신성식.이충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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