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지하갱도 합치면 54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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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차 얼마 전 북한을 다녀온 L씨는 평양 시내와 순안 비행장을 잇는 길에서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이른 아침 줄지어 걸어가던 주민들의 끝없는 행렬이 큰 길을 벗어나 1㎞ 정도 떨어진 언덕 부근에 이르자 갑자기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수천 명은 넘을 남녀 노동자와 정복 차림의 군인들이 마치 블랙홀에 빠져들 듯 한 곳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행렬이 사라진 곳에는 붉은 깃발을 든 무장 경비병만 배치됐을 뿐 아무런 시설이 없어 의아했다. 서울에 돌아온 뒤 관계 당국으로부터 "그곳은 북한이 군수품을 생산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지하시설"이란 설명을 듣고 나서야 L씨는 의문이 풀렸다. 국가정보원이 13일 국회 정보위 간담회에서 밝힌 함북 길주의 지하갱도도 북한 전역에 구축된 이런 지하시설 중 하나다.

◆ 전역이 지하 요새=관계당국에 따르면 북한은 8200여 곳에 군 관련 지하시설물을 구축해 놓았다. 총 길이 547㎞로 경부고속도로(417㎞)보다 훨씬 길다. 북한은 또 1990년대 말 주요 군수공장 180여 개를 지하화하는 등 주요시설을 땅 속으로 들여보내고 있다. 공군 비행장의 활주로가 아예 산 하나를 관통하는 곳도 있다. 지하시설 구축에서만큼은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평가다.

정보 당국자는 13일 "북한의 지하시설 가운데 규모가 일정 수준 이상인 것은 한.미가 공동으로 감시망을 가동해 10수년 이상 면밀히 관찰 중"이라며 "굴착으로 토사가 대규모로 나오는 등 활동이 활발해질 경우 집중 감시대상이 된다"고 귀띔했다.

북한은 지하설비로 짭짤한 수익을 챙기기도 했다. 98년 북한이 금창리 지하시설에서 수천 명의 군인이 작업을 벌이는 게 미 첩보위성(KH-11)에 포착됐다. 핵 의혹시설로 지목된 금창리를 확인 방문하기 위해 미국은 60만t의 쌀 지원이란 '지상 최대의 관람료'를 지불했지만 조사단이 발견한 건 텅 빈 동굴뿐이었다.

북한은 지하시설 건설과 유지.관리에 엄청난 비용을 쏟아붓고 있다. 70년대 본격적으로 만든 지하 군수공장 등은 노후된 전기배선 때문에 문제가 심각하다. 연간 약 120억kWh 정도인 실질 전력소비 중 송배전 손실률이 30%(통일부 자료)나 되는 것도 이런 사정과 관계 있다. 습기 등으로 환경이 열악한 지하 군수공장에서 폭약을 다루다 대형 참사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는 게 정보 당국의 판단이다.

◆ 국정원이 밝힌 길주 지하시설=고영구 국정원장은 13일 비공개 간담회에서 "한.미 양국은 90년대 말부터 길주 지역에서 용도 미상의 갱도 굴착 징후를 포착하고 관련 동향을 추적해 오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고 원장은 "아직 핵실험 징후로 파악할 증거는 없다"고 보고했다. 여야 정보위원들에 따르면 고 원장은 "길주 지역에서 터널 메우기와 관람대 신축 등 핵실험 준비 동향이 포착됐다는 일부 언론 보도는 사실이 아니다"라고 보고했다.

다만 고 원장은 "미국이 예전에 지하 핵실험을 수직.수평 갱도에서 했고, 인도와 파키스탄도 그렇게 (핵실험을) 했다"면서 "길주 지역이 암반지역으로 핵실험 장소로 좋은 환경"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핵실험을 위해서는 관측소 등 추가 시설을 세우고 많은 사람과 물품이 포착돼야 하는데 이런 것이 없다"고 했다.

이영종.김정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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