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선재센터 7인의 '느림' 展

중앙일보

입력

잘 알다시피 우화 '토끼와 거북이' 에서 경주의 승자는 거북이였다. 이 우화의 교훈은 '성실하게 살아라' 이지만 한편으론 자신의 역량을 파악해 고유의 페이스를 지키는 것이 중요함을 깨닫게 한다. 즉 '속도' 란 무조건 빠르게 가는 것이 아니라 발걸음을 조절하는 것이다. 오는 28일부터 열리는 아트선재센터의 '느림' 전은 미술 작품을 통해 '한국적 속도' 를 모색한다.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빠른 것이 곧 진보' 라는 생각이 만연했다. 다분히 강박증적이었다. 그래서 뭐든지 빠르게 변화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느림' 전은 여기에 브레이크를 건다. 우리 삶의 근간을 흐르던 유유자적과 소요(逍遙) 의 정신을 끄집어내 먼지를 턴다. 기획을 한 김선정 큐레이터는 "인터넷이다, 디지털이다 하면서 급속도로 바뀌어가는 틈바구니에서 우리만의 속도를 찾아보자는 것" 이라고 설명했다.

1990년대 들어 예술 분야에서 이러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작가 7명을 모았다. 김수자.이불.배병우.육근병.최정화.김영진.박홍천씨 등이다. '보따리 작가' 로 국제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김수자씨는 해진 조각천과 이불보를 보아 바느질해 보따리를 만든다. 그녀는 이것을 트럭에 싣고 기나긴 여행을 떠난다. 비디오에 담긴 그녀의 여행 퍼포먼스는 시간과 공간의 흐름이 응축돼 있다는 평을 받는다.

배병우씨는 소나무가 들어선 특유의 흑백 사진으로 작가의 일상, 나아가 우리 민족의 역사를 다룬다. 김영진씨는 스스로 고안한 장치에 물과 기름, 글리세린 등의 액체를 채우고 그 속을 떠다니는 물체들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일정하지 않은 움직임은 인간이 인위적으로 정해놓은 시간이라는 개념의 덧없음을 말하기 위한 것이다. 육근병씨의 비디오에는 밤부터 새벽 동이 트기까지 실제 시간이 담겨 있다.

이들이 정적이고 시적인 은유를 택했다면 이불.최정화씨는 물질과 정신의 발달 속도에 현저한 차이가 있음을 지적한다. 이씨는 사이보그를 통해 현대 기술문명은 급속도로 발전했지만 여전히 여성은 고정관념의 틀 속에 존재하는 모순을 지적한다.

이 전시는 그간 아시아권 국가들과 교류를 꾸준히 가져온 아트선재센터가 호주 현대작가전 '언홈리' 와 교환전 형식으로 '수출' 한 것이기도 하다. '느림' 은 우리 현대미술이 호주에 본격적으로 소개된 최초의 자리였다. 98, 99년에 걸쳐 멜버른 빅토리아 내셔널 갤러리와 시드니 뉴 사우스 웨일즈 아트 갤러리에 소개돼 호평을 받았다.

한국의 '컨템퍼러리 아트' 가 어떤 것인지 궁금한 이들이 찾아볼 만한 전시다.3월5일까지. 02-733-8944.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