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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력 ‘패러다임’을 바꾸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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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정연호
한국원자력연구원장

후쿠시마가 우리에게 주는 진정한 교훈은 무엇인가. 지난 두 달간 필자를 포함한 원자력계 종사자들이 수도 없이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이다. 원자력의 포기인가. 아니다. 21세기 선진국가로서 생존을 포기할 생각이 아니라면 주된 전력원인 원자력을 놓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방향의 전환인가. 그렇다. 그렇다면 무얼 어떻게 바꿔야 하나.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처음 우리에게 규모 9.0의 대지진과 10m가 넘는 쓰나미라는 천재(天災)로 다가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천재와 함께 인재(人災)임이 드러나고 있다. 사고가 난 원전들이 구형이었다고 하지만 엄청난 강진에도 핵심 구조물들은 파괴되지 않았고 지진과 동시에 정해진 대로 자동 정지됐다. 그러나 뒤이은 쓰나미로 전원이 끊기면서 원전의 냉각 기능이 상실됐다.

 냉각 기능을 상실한 원자로는 노심 용융 같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기 전까지 약 8시간의 여유가 있다. 그 8시간 안에 바닷물을 주입했다면 상황이 이처럼 최악으로까지 치달았을까. 사용후 핵연료 저장 수조의 문제 발생을 미리 모니터링할 수는 없었을까. 최악의 상황에 최선의 선택을 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원자력 발전소라는 ‘기계’가 ‘인간’에게 허락해준 ‘시간’ 안에 적절한 조치들을 취하지 못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후쿠시마를 보면 우리가 선택해야 할 길이 비교적 분명히 보인다. 우리 원전은 사고가 난 일본 원전과 달리 인적 오류를 최소화하고 만약의 상황에도 대비할 수 있는 많은 안전장치들을 갖추고 있다. 그러고도 만의 하나 이런 안전장치들로도 통제할 수 없는 중대사고가 발생할 경우에 대비한 연구를 꾸준히 수행해 노심 용융과 증기 폭발 같은 분야에선 국제 공동연구를 선도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러나 ‘꾸준히’ 해왔다는 게 ‘충분히’ 해왔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일본처럼 중대사고 연구 자체를 중단하진 않았지만 기본적으로 중대사고는 현실에서 발생할 수 없는 ‘가상사고’라는 전제 하에 연구가 진행돼 왔기에 연구의 폭과 깊이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철학이 바뀌면 행동도 바뀌어야 한다. 중대사고에 대한 연구와 대비를 강화하는 것은 물론 지진과 쓰나미에 대비한 연구개발과 시설 보강도 강화해야 한다. 로봇 대국 일본의 원전 사고에 일본 로봇은 맥을 못 추고 미국 로봇들이 움직이는 장면을 목도했다. 완결 짓지 못한 기술이 극한 상황에선 얼마나 의미 없는지 후쿠시마는 말해 주고 있다. 원전의 안전을 강화하고 만약의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기술들을 지금까지보다 더 적극적으로 개발하고 개발된 기술은 적극적으로 현장에 적용돼야 한다.

 후쿠시마의 또 다른 교훈은 관료주의의 벽이다. 일본 원자력계는 산업계와 연구계와 대학이 높은 벽을 쌓고 소통에 소홀한 측면이 있었다. 반면 우리 원자력계는 산·학·연이 때론 분업하고 때론 협력하고 때론 견제하면서 균형을 맞추는 능력이 있다. 그렇더라도 혹시라도 원자력의 안전을 높이는 데 장애가 되는 소통의 동맥경화가 없는지 이 기회에 따져보고 고칠 것은 고쳐야 할 것이다. 후쿠시마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원자력을 더욱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가 우리에게 있다고 믿는다.

정연호 한국원자력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