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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계 복귀 DJ, 기자들이 따지자 “그 부분은 할 말 없어요”

중앙선데이

입력

2년7개월간의 유랑이 끝났다. DJ는 1995년 7월 18일 정계 복귀를 선언했다. 비난 여론이 쏟아졌지만 어차피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을 향한 그의 집념은 누구도 막을 수 없을 만큼 강렬했다. [중앙포토]

오랜 기다림은 끝났다. 1992년 12월 19일 정계를 은퇴한 뒤 끊임없이 참고 견뎌왔던 시간들. 무려 2년7개월간이었다. 그 길고 고통스러운 터널의 끝이 보이고 있었다. 95년 치러진 6·27 지방선거는 DJ를 패배와 고립으로 몰아넣었던 외부 상황을 일거에 정리해 버렸다. 3당 합당으로 형성된 DJ 고립구도는 붕괴됐다. 거꾸로 김영삼(YS) 대통령에 대한 반감이 광범하게 퍼져가고 있었다. 김일성 사망을 둘러싸고 보여준 외교적 역량 덕분에 DJ는 국제 사회의 명성도 얻었다. 특히 미국 클린턴 행정부가 강력한 지지자였다. 게다가 지자체 선거 과정에서 민자당이 제기했던 ‘세대교체론’은 오히려 백신주사 역할을 했다. 선거 승리의 여세를 몰아 DJ는 “봐라, 국민이 원하는 건 세대교체도 아니고, 나의 은퇴도 아니지 않느냐”라고 큰소리 칠 근거를 확보한 것이다.

월 27일 밤, 일산에서 선거 결과를 지켜보던 DJ가 말했다. “경기지사 선거는 아쉽지만 이만하면 민주당이 선전했어요. 자민련은 예상 외로 큰 성과를 얻었어요. 야당이 대승했어요. 하지만 자만하면 안 돼요. 그럼 민심이 등을 돌려요. 내일 아침 8시에 아태재단에서 하기로 한 기자회견을 취소하는 게 낫겠어요. 당 기자실에 알려주세요. 그리고 내일부터 의원들도 안 만나겠어요. 당분간 휴식을 취하겠어요.”

측근들에게는 함구령이 내려졌다. “(DJ의) 허락 없이는 어떤 정치 발언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자칫하면 그간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는, 민감한 시기였다. 평생 정치를 해 온 DJ는 실수가 대부분 입에서 시작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쓸데없이 YS나 민주당 이기택 총재를 자극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이었다.

입은 다물었지만 눈까지 감은 건 아니었다. DJ는 아침마다 10개쯤 되는 신문을 다 챙겨 읽었다. 정치권 동향은 조각 기사나 가십 기사도 빼놓지 않았다. 중요한 칼럼과 기사는 빨간 사인펜으로 체크해 나에게 건네줬다. 그걸 잘라 A4용지에 복사해 드리면 장소를 안 가리고 틈날 때마다 읽었다. 아이디어가 생각나면 바로 복사지 옆에다 적었다. 주로 비판에 대한 반박 논리였다. 당시의 관심은 ▶YS와 청와대 참모들의 동향 ▶정계 복귀 관련 기사 ▶김종필(JP) 자민련 총재의 정치적 발언과 움직임 ▶충청권과 대구·경북 의 민심 동향에 집중됐었다. 그걸 위해 DJ는 지방신문까지 챙겼다. 광주일보는 물론 대전일보와 대구 매일, 부산 국제신문 등을 꼼꼼히 읽었다. 지방에 내려가면 자신에 대한 기사를 쓴 기자들을 만나려고 노력했다. 비판 기사는 강도를 낮추고, 우호 기사는 더 자주 나가게 하기 위해서였다.

6월 30일, 서울 서교호텔에서 선거 후 첫 비공개 모임이 열렸다. DJ와 권노갑·김근태 부총재, 정대철·이종찬 고문, 이해찬 서울시 부시장, 임채정 의원이 참석했다. 임 의원이 탁 깨놓고 말했다. “민주당 내에서 전당대회를 하느니 신당을 창당해 정면돌파 합시다.” 동교동계가 당권을 장악해봐야 두고두고 이 총재 쪽이 발목을 잡을 것이니 차라리 결별하자는 주장이었다. 권노갑 부총재, 이종찬 고문, 이해찬 부시장이 찬성했다. 김근태 부총재와 정대철 고문은 “여론의 부담이 크다”고 반대했다. DJ는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DJ가 함구령을 내리고 막바지 정국 구상을 하던 열흘간 동교동계 내부에선 유사한 공방이 계속 오갔다. DJ의 정계복귀에 대해 모두 다 쌍수를 들고 환영한 건 아니었다는 얘기다. 이강래 보좌역 같은 이가 대표적이다. 그는 6·27 지방선거에서 승리했지만 DJ의 정계복귀 명분이 무르익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기택 총재와 결별하면 결국 다시 호남당이 돼버린다. 그런 구도에서 내년 총선을 치르면 결과는 뻔하다. 그러니 총선 때까지는 DJ가 백의종군하면서 지원 유세를 하고, 그 다음에 정계복귀 문제를 검토하자’는 거였다. DJ의 투사 이미지, 빨갱이 이미지도 완전히 개선되지 않았다는 지적도 덧붙였다.

민주당 내 호남 의원들의 의견도 다양했다. 지자제 선거에서 드러난 DJ의 득표력에 대해선 아무도 이의를 달지 못했다. 호남 표를 결집시키려면 DJ가 정계에 복귀해야 한다는 데 대해서도 대체로 동의했다. 그러나 DJ가 차기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을지에 대해선 의심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DJ 역시 그 부분을 많이 고민했다. 최선의 방책은 이기택 총재를 끌어안아 전국당의 이미지를 유지하고, 대신 당권은 장악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치는 사람이 하고,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다. 따라서 정치는 감정에 따라 왔다갔다 하는 건지도 모른다. DJ와 이 총재는 이미 너무 많은 상처를 서로 주고받은 사이였다. 만일 예정대로 8월에 민주당 전당대회가 치러질 경우, 끔찍한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었다. 야당이 여러 번 경험했던 이른바 ‘각목대회’가 재연될 가능성이다. 그렇게 되면 DJ의 이미지는 또 한번 결정타를 맞는 거였다.

DJ는 7월 초에 마음을 정했다. 한화갑 의원이 사전 분위기 조성에 나섰다. 정치인이 정치 활동을 하는 건 당연하다. 세 번 네 번 출마한다고 해서 문제가 될 게 없다.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최선을 다하는 게 정치인의 본분이고 책무다. 은퇴 선언을 지킬 거냐 번복할 거냐는 전적으로 당사자의 판단이다. 법적 하자가 없는 권리는 보장돼야 한다.

DJ는 7월 6일 박지원 민주당 대변인을 불러 신당 창당 계획을 언론에 우회적으로 알리라고 지시했다. 신문들마다 익명의 소식통을 인용한 신당 창당 기사가 일제히 1면을 장식했다.

7월 10일, DJ는 범동교동계 핵심 인사들을 비밀리에 스위스그랜드 호텔로 소집했다. 신당 창당과 관련한 최종 확인 작업이었다. DJ는 이미 하루 전날부터 이 호텔 12층에 방을 얻어놓고 구상을 거듭하고 있었다. 전체 회의에서 자신의 뜻이 제대로 반영되도록 DJ는 동교동 핵심 인사들을 사전에 따로 호출해 의중을 설명했다. 모임은 오후 8시부터 우거지탕과 삼계탕 저녁식사로 시작돼 다음 날인 11일 오전 2시30분까지 릴레이로 진행됐다. 17명이 참석했다. 권노갑·김원기·한광옥·신순범·김근태 부총재, 김상현·정대철·이종찬·이용희 고문, 김태식 사무총장, 신기하 원내총무, 김병오 정책위의장, 김영배·안동선·임채정·박상천 의원과 이해찬 서울시 부시장이었다.

DJ는 비장했다. “나는 국민의 심판을 받겠다. 정계복귀를 해도 모든 걸 내 책임하에 하겠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일부 인사들은 호남당 이미지를 벗어나려면 DJ가 정계복귀를 해도 전면에 나서진 말고 신당 대표도 외부에서 영입해 와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DJ의 발언은 이런 주장을 일축하는 것이었다. 7월 18일에 정계복귀 선언을 할 것이고, 정기국회가 열리는 9월 10일 이전까지 신당 창당을 완료하겠다는 계획도 공개했다. 이 행사가 끝나고 사흘 뒤 민주당 의원들이 DJ의 정계복귀를 공개적으로 요청했다. 김대중 자서전에는 그 내용이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1995년 7월 13일, 나는 국회의원 51명의 결의로 정치 재개를 요청받았다. 의원들은 야당을 바로세우고 김영삼 정권의 실정으로 위기에 처한 나라를 바로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이를 수용하기로 했다. 일시적인 비난을 받더라도 국민의 고통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유세장에서 느끼는 민심은 여전히 나를 원하고 있었다. 당원들도 야당을 바로세우고 지지 세력을 결집할 수 있는 인물은 나뿐이라는 얘기들을 했다. (제1권 653쪽)

정계복귀 선언 사흘 전인 7월 15일, 아태재단에서 DJ가 물었다. “장 동지, 지난번 보고했던 지방선거 승리 요인을 다시 한번 말해 보세요.” “예, YS 정부의 사정 정국에 대한 보수의 반발이 크게 작용한 것 같습니다.” “그것이 전부인가?” “총재님과 JP를 통해서 YS를 견제해 달라는 요구도 강했던 것 같습니다.” 그제서야 DJ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바로 그거야. 장 동지, 내일 모레 글피 18일에 국민을 향해 정계복귀 선언을 할 생각인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다방면의 사람들을 접촉해 보고하세요. 이제 시간이 없어요.”

DJ가 지시한 대로 기자와 교수들을 만나 조언을 구했다. 그런데 떨떠름한 반응이 많았다. “아니, 정치 안 한다고 하다가 다시 하면서 무슨 구차한 변명을 합니까. 언제 국민이 은퇴하라고 해서 했나, 본인이 알아서 한 거 아닌가요. 그럼 복귀도 마찬가지지. 무슨 변명은.”

당시 이화여대에 있었던(현재는 고려대) 임혁백, 서강대 강정인 교수 등의 충고는 간단했다. 자꾸 이상한 논리 앞세워 국민을 설득하려 들지 말라는 것이다. 일리가 있었다. 이런 내용을 보고하자 DJ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정계복귀 메시지는 최대한 간단하게 가기로 했다. 요약하면 ‘죄송하다. 할 말 없다. 앞으로 잘 하겠다’는 거였다.

기자회견장에서 DJ는 그대로 했다. 정계복귀가 대국민 약속을 어긴 거라는 기자들의 질문에 DJ가 말했다. “죄송합니다. 그 부분은 제가 할 말이 없습니다.”

당시 중앙일보가 보도한 여론 조사에 따르면 DJ의 정계복귀에 대해 반대가 73.2%였고 신당에 대해서도 창당 반대가 71.1%나 됐다. 하지만 그 정도의 반발을 예상 못한 것도, 각오 안 한 것도 아니었다. 여론은 정치인의 처신에 따라 얼마든지 변하는 법이다. DJ는 이제 족쇄를 벗었다. 남은 건 필생의 목표였던 대통령이 되기 위해 온몸을 내던지는 것뿐이었다.

정리=김종혁 중앙SUNDAY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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