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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계, 고혈압·당뇨·치매·비만 합병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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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정연수 서울지하철노조 위원장이 4일 서울 용답동 군자차량기지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조문규 기자]


노동계에 변화의 바람이 분다. 발원지는 서울지하철노조다. 숨죽여 온 노심(勞心)이 한번 고개를 들자 견고한 민주노총의 울타리도 뚫렸다. 민주노총 출범의 구심점이었던 서울지하철노조가 탈퇴한 것이다. 여세를 몰아 제3노총을 추진하고 있다. 가칭 ‘국민노총’이다. 파업과 쇠파이프를 버리고 탈(脫)이념·탈(脫)투쟁을 앞세웠다. 생활형 노동운동으로 한국노총·민주노총 양대 체제를 일거에 무너뜨리려 한다. 복수노조가 허용되는 7월, 지하철노조발 변화의 바람은 과연 노동운동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태풍으로 자랄 수 있을까. 지난 4일 서울지하철 노조 사무실에서 정연수(55) 위원장을 만났다.

 -노동절에 시위나 집회 대신 봉사를 택했다.

 “시민이 등을 돌리는 노동운동은 항상 실패했다. 현재 국민 85%가 노동운동을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이런 상황에서는 노조의 협상력을 키울 수 없다. 사회의 주체로서 책임을 다할 때, 시민의 지지를 받을 때 임단협도 성공리에 타결 지을 수 있다. 그런 차원에서 지난달 30일 서울 하계동 노인복지관에 조합원 500명이 자원봉사 활동을 벌였다.”

 -민주노총 탈퇴를 결심한 계기는.

 “현재의 노동운동은 너무 이념적이고 투쟁적이다. 반(反)제도·반(反)시장·반(反)자본의 혁명적 노동운동이다. 합리나 이론보다 물리력과 단결력을 더 중시한다. 한때는 노조 간부가 무소불위의 권력이었다. 어깨 힘주고, 눈을 부릅뜨고 인사까지 좌지우지했다. 상층 지도부의 기득권 유지를 위한 이념투쟁과 귀족노동 운동으로 전락했다.”

-탈퇴에 53%가 찬성했다. 반대도 만만찮은 셈이다. 규약을 들어 무효를 주장하는 측도 있다. 복수노조가 허용되면 떨어져 나갈 공산이 큰데.

 “지난해에는 반대가 더 많았다. 올 들어 바뀐 셈이다. 그만큼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는 증거다. 민주노총과 연계된 세력이 딴죽을 건다. 그들이야 그럴 수 있다. 다만 불법이나 무효란 주장은 터무니없다. 노동관계법도 과반수로 돼 있다. 물론 복수노조가 생길 수도 있다. 만약 다른 노조가 생긴다면 서로 소통하고 협력하면 된다. 단일 노조는 오히려 상대를 궤멸하거나 굴복시키는 쪽으로 흐른다. 복수노조는 그런 점에서 소통문화를 확산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노동계를 분열시킨다는 비난도 있다.

 “뉴라이트라거나 개인의 영달을 위한 것이란 주장은 흑색선전이다. 노동운동의 패러다임이 바뀔 때가 된 것뿐이다. 7월이면 한 사업장에서도 복수노조가 가능해진다. 다양한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노동계를 만성 성인병 환자로 비유했던데.

 “첫째, 고혈압이다. 바로 이념 과잉이 초래한 위기다. 일각에선 종북(從北)까지 주장한다. 그럼 김정일에게 가자는 말인가. 둘째, 당뇨병이다. 조직의 위기다. 민주노총은 금속·보건·운수 등 산별 교섭을 주장한다. 나라마다 문화가 다르고 사업장마다 여건도 다르지 않나. 운수도 지하철·택시·버스·항공·해운까지 묶자고 하는데, 자본의 성격과 내용이 다르다. 누구는 폼을 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장에선 실효성이 없다. 셋째, 치매인데 소통의 위기다. 상층부와 사업현장이 따로 논다. 생각도 다 다르다. 왜, 무엇 때문에 노동운동을 하는지 잊어버린 것 같다. 마지막으로 부패와 비리가 만연한 조합 간부는 탐욕이 빚어낸 비만 증세다.”

 -주인노동운동을 주장하는데.

 “노동자가 주인이란 얘기다. 사실 서울시장이나 서울지하철공사 사장도 월급쟁이가 아닌가. 종속노동운동은 무언가 따내는 것만 골몰한다. 주인은 다르다. 경영에도 참여하며, 노사가 함께 꿈과 희망을 실현하는 것이다.”

-가칭 국민노총에는 얼마나 참여할 것 같나.

 “이달 중 새희망노동연대를 통해 국민노총 추진위를 발족하고 6월 중에는 출범시킬 계획이다. 현대중공업, KT, 영진약품과 시·도교육청연맹, 광역시·도연맹, 호텔서비스도 참여한다. 삼성생명과 포스코도 접촉하고 있다. 향후 2~3년 내 노동계의 지형이 바뀔 것이다.”

 원래 운수사무직이었던 정연수 위원장은 1995년 이후 선거에서 다섯 차례 떨어졌다. 처음엔 1대 300의 싸움이었다고 한다. 기존의 조직에 단신으로 맞선 것이다. “다른 생각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세월이 흐르며 조합원의 생각도 달라졌고, 그 결과 위원장에 당선됐다는 것이다. 그가 꿈꾸는 각목과 쇠파이프 없는 ‘생활형 노동운동’이 과연 가능할까. 온 국민이 주목하고 있다.

글=박종권 선임기자
사진=조문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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