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당한 캐서린 … 그녀, 신데렐라 맞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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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신데렐라(연대 미상), 찰스 랜드시어(1799∼1879) 작, 캔버스에 유채, 73x93㎝, 개인 소장

윌리엄-캐서린 영국 왕세손 부부.

지난주 지구촌 화제의 인물은 영국 윌리엄 왕세손과 결혼한 캐서린(케이트 미들턴)이었다. 아직도 귀족이 존재하는 영국에서 드물게 평민 신분으로 세손 빈(嬪)이 되었기에 ‘현대판 신데렐라’라고 불린다. 하지만 캐서린이 정말 신데렐라일까. 뉴욕 타임스의 칼럼니스트 로저 코언도 지적했듯이 그녀는 오랜 귀족 가문이 아닐 뿐이지 엘리트 교육을 받은 부잣집 딸이라서 ‘재투성이’ 신데렐라와는 거리가 멀다. 또 캐서린은 결혼 때 복종서약을 거부할 만큼 당차다. 그런데도 왜 사람들은 캐서린을 신데렐라로 부르고 싶어할까. 그리고 왜 신데렐라 이야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렇게 인기가 있을까.

어쩌면 ‘신데렐라 콤플렉스(Cinderella Complex)’가 동화 ‘신데렐라’의 변함없는 인기에 한몫하는지도 모르겠다. 이 용어는 미국의 심리요법 전문가 콜레트 다울링이 쓴 동명의 책(1981)에서 처음 나왔다. 적지 않은 여성이 스스로 삶을 개척할 의지를 갖지 못하고 대신 삶을 일변시켜 줄 왕자 같은 남성을 기다리는 것을 꼬집은 것이다.

 신데렐라의 이런 부정적 이미지는 전 세계에 있는 수많은 신데렐라류 설화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상드리용’(1697) 때문이 아닌가 싶다. ‘상드리용’은 ‘재투성이’라는 뜻으로 ‘신데렐라’는 상드리용을 영어로 옮긴 것이다. 프랑스 작가 샤를 페로(Charles Perrault·1628~1703)가 정리한 이 동화에서 상드리용은 무도회에 가고 싶다는 말조차 못 꺼낸 채 흐느껴 운다. 그러자 요정 대모(代母)가 나타나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 참으로 대책 없으면서 운은 좋은 아가씨다.

 ‘상드리용’이 신데렐라류 설화를 대표하게 된 것은 다른 신데렐라류 설화에는 없는 몇몇 매혹적인 이미지, 이를테면 요정 대모가 생쥐를 은회색 말로, 늙은 호박을 황금마차로 변신시키는 장면 때문일 것이다. 신데렐라 그림 중 가장 유명한 에드몽 뒬락의 ‘상드리용’ 삽화(1910)에서도 요정 대모가 호박을 마법지팡이로 건드리는 장면(그림 ③)이 특히 인기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 상드리용은 여러 설화의 신데렐라 중에서도 가장 소극적이고 재미없는 캐릭터다.

② 신데렐라 : 그림동화(1891), 프레더릭 홀스(1860∼1948) 작, 캔버스에 유채, 183.5ⅹ152.3㎝, 개인 소장

 독일의 그림(Grimm) 형제가 정리한 그림동화 버전 신데렐라 이야기 ‘아셴푸틀(Aschenputtel)’(1812)은 조금 다르다. 역시 ‘재투성이’라는 뜻의 아셴푸틀은 죽은 친어머니의 무덤에 개암나무 가지를 심고 자신의 눈물로 키운다. 이윽고 나뭇가지가 커다란 나무가 되자 하루에 세 번씩 나무 앞에서 기도한다. 그러면 그때마다 하얀 비둘기가 나타나 아셴푸틀의 소원을 들어준다. 그림 형제는 기도라고 얼버무렸지만 아셴푸틀은 유럽 중세에 금기시된 마법을 행한 셈이다.

 상드리용이 무도회에 가겠다는 말도 못 꺼낸 것과 달리 아셴푸틀은 자신도 가겠다고 말한다. 계모가 재 속에 흩어진 콩을 모두 주워야 갈 수 있다고 하자 비둘기와 다른 새들을 불러 곧 그 일을 해낸다. 영국의 화가 프레더릭 홀스의 작품(그림 ②)에 수많은 새가 등장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래도 끝내 계모가 아셴푸틀을 데려가지 않고 떠나자 그녀는 개암나무로 뛰어가 옷을 달라고 해서 찬란한 드레스와 황금구두를 받아 스스로 무도회장에 달려간다. 상드리용은 연약한 유리구두를 신었고 아셴푸틀은 단단한 황금구두를 신은 게 그 둘의 차이를 말하는 것 같다. 여자의 활동이 극도로 제약된 중세사회에서 나름대로 적극적으로 행동한 셈이다.

 영국 화가 찰스 랜드시어의 ‘신데렐라’(그림 ①)에는 ‘상드리용’과 ‘아셴푸틀’ 이야기가 섞여 있다. 유리구두가 나오는 것은 ‘상드리용’의 특징이지만 시종이 아닌 왕자가 직접 와서 구두를 신겨보는 것은 ‘아셴푸틀’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아셴푸틀’에서는 새 언니들의 운명도 다르다. 아셴푸틀의 결혼식 날 새 언니들이 한몫 얻으려고 그녀에게 달라붙자 비둘기들이 그들의 눈을 쪼아버린 것이다! ‘상드리용’에서는 언니들이 용서받았다.

③에드몽 뒬락(1882∼1953)의 ‘신데렐라’ 삽화(1910).

 이 결말은 소름끼치지만 어쨌든 ‘아셴푸틀’을 보면 신데델라류 스토리라고 해서 주인공이 다 무력하고 하염없이 왕자의 구원만 기다리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신데렐라류 이야기의 더 일관된 공통점은 오랫동안 재를 뒤집어쓰고 고생하던 주인공이 어느 날 눈부시게 변신해 자신의 진정한 매력을 드러내고 행운을 찾는다는 것이다. 사실 서구에서 신데렐라라는 말은 운 좋게 남자 잘 만나 팔자 고치는 여자에게만 쓰는 것이 아니다. 문단이나 예술계에서 오랫동안 진가를 인정받지 못하다가 어떤 계기로 혜성같이 부상하는 인물에게 남녀 불문하고 신데렐라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일례로 폴 포츠가 나타났을 때 많은 해외 매체가 그를 ‘신데렐라’라고 불렀다. 처음 영국 TV 오디션 프로그램에 등장했을 때 평범한 직업에 초라한 외모를 지닌 그는 재투성이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아름다운 목소리로 오페라 아리아를 부르는 순간 그는 요정 대모가 변신이라도 시켜준 것처럼 빛나는 모습으로 보였다. 사람들은 그런 드라마틱한 변화에 열광한다. 그래서 우리나라에도 오디션 프로그램이 폭발적인 인기를 얻는 것이다.

 그러니 신데렐라 스토리 속에는 타인의 도움으로 신분상승하는 허황된 신데렐라 콤플렉스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랜 고생 끝 인간 승리라는 긍정적 판타지도 담고 있다. 그리고 어느 쪽이든 고달픈 현실에서 인생역전을 바라는 우리의 꿈을 반영하고 있기에 변함없는 인기를 누리는 것이다.

문소영 기자

유리구두가 아니라 모피신발이라는데…

신데렐라류 설화의 대표작인 『상드리용』(1697)의 원제는 『상드리용 또는 작은 유리신(Cendrillon ou La Petite Pantoufle de Verre)』이다. 투명하게 반짝이는 유리구두는 월트 디즈니의 애니메이션(1950) 등을 통해 신데렐라를 대표하는 이미지로 굳어졌다. 그런데 구두를 하필 유리로 만드는 게 말이 되느냐는 의문 때문에 논란이 있어 왔다. 샤를 페로는 원래 vair(고급 다람쥐 모피) 신발이라고 썼는데 프랑스어 동화를 영어로 옮기는 와중에 번역자가 vair를 verre(유리)로 착각해 glass slipper라고 번역하는 바람에 유리구두가 됐다는 주장이 한때 유력했다. 요즘은 페로가 원래부터 신비로운 이미지를 위해 유리신으로 설정했다는 주장이 더 힘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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