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지 붙이고, 페인트칠하며 아빠와 평소 못하던 얘기 나누니 친구들이 부러워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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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3일 경기도 일산서구 일산동 소재 일명 ‘쪽방촌’. 6.6㎡(2평) 남짓한 어두운 단칸방 안에서 전우면(47·자영업·경기도 파주)씨가 사다리 위에 올라 벽지를 천장에 붙이고 있었다. 부인 정은숙(42·회사원)씨는 빗자루를 좌우로 움직이며 벽지를 붙였다. 딸 전영민(파주 해솔중 3)양은 마른 걸레로 뒷마무리를 하고 있었다. 하루종일 집 고치기 봉사를 한 전씨 가족과 동행했다.

“아빠, 힘내세요.” 함께 봉사활동을 하면서 아버지 전우면씨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손수 닦아주는 딸 전영민양. [김경록 기자]

한 달에 한 번 온가족이 봉사현장으로 출동

보라색 꽃무늬 포인트 벽지까지 바르고 도배를 마무리했다. 이어 세 사람은 각자 흩어져 전씨는 톱질을, 정씨는 가재도구 세척을 시작했다. 전양은 롤러에 흰 페인트를 듬뿍 묻혀 회색 담벼락에 칠했다. 전씨 가족은 매월 토요일 하루를 할애해 해비탯(집을 짓거나 고치며 빈민들의 열악한 주거환경을 개선하는 NGO 단체) 봉사 현장을 찾는다. 주로 노인들이 홀로 거주하는 ‘쪽방’이라 불리는 단칸방을 고친다. 방진 마스크를 써야 할 정도로 냄새가 나고 먼지가 나도 집안 가득한 쓰레기를 치우는 데 아랑곳하지 않는다. 장판과 벽지를 모두 뜯어내 새로 도배를 하고 장판을 깐다. 무거운 짐도 척척 나른다. 집 고치기 봉사는 6개월 전 전씨와 아들 전진형(서울 대일외고 2)군 부자가 의기투합해 먼저 시작했지만 3월부터 정씨와 전양 모녀까지 합류해 온가족이 참여하게 됐다.

꿀맛 같은 쉬는 시간. 가족이 다시 모였다. 밖에 내놓은 가재도구 아래 깔아둔 비닐 끝자락에 세 사람이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전씨 부녀가 장난을 치자 옆에서 정씨가 “모처럼 살을 맞대고 앉으니 참 좋다”고 말했다. “봉사활동을 시작하고 아빠와의 대화가 부쩍 늘었어요.” 전양은 봉사활동을 통해 아버지와 한결 더 친해졌다. 전양은 “엄마와는 평소에도 대화할 기회가 많지만 아빠랑은 그런 기회가 별로 없어 멀게 느꼈었다”며 “봉사라는 공통 화제로 대화의 물꼬를 터 이제는 식사 시간에 대화가 끊이지 않게 됐다”고 말했다. 많은 아버지가 ‘청소년기 자녀와 소원하다‘는 고민을 하지만 전씨는 봉사활동으로 이를 타개했다. 전양은 “아빠와 어색하다는 친구가 많다”며 “아빠와 땀 흘리며 함께 봉사활동을 하는 내 얘기에 다들 부러워한다”고 말했다.

아버지와 함께 봉사하며 자연스레 인성 교육

전씨는 “가족 봉사활동은 아빠가 가정교육의 전면에 나설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말했다. 전씨는 ”주중엔 ‘직장 일로 바쁘다’고, 주말엔 ‘피곤하다’며 막상 자녀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내기 힘든 게 사실”이라며 “하지만 아빠가 먼저 마음을 굳게 먹는다면 골프나 등산, 바둑, 낚시 등에 쓰는 시간을 한 달에 한 번 정도 가족에게 내는 건 어렵지 않다”고 말했다. 어머니 주도 아래 가정교육의 분위기가 흘러가는 경우가 많아 아빠들은 자녀가 커갈수록 소외감을 느끼는 경우가 다반사다. 전씨는 “봉사활동은 아빠가 주도적으로 이끌 수 있는 여지가 많아 가장으로서의 자부심과 함께 보람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전씨는 “집안 분위기도 확실히 더 화목해졌다”며 웃으며 덧붙였다.

정씨는 “봉사활동으로 자연스럽게 인성교육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전양은 “처음엔 쓰레기로 가득 찬 좁은 집을 보고 정말 놀랐다”며 “내 작은 노력으로 누군가 좀 더 깨끗한 환경에서 살 수 있다는 생각에 책임감까지 든다”고 말했다. 전씨도 “아이들이 작은 일에도 감사할 줄 알게 됐다”며 “아이들이 ‘이분들이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이유는 과연 뭘까’라며 소외된 이웃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모습을 보인다”고 말했다.

새 벽지를 바르고 장판도 새로 깐 방안에 깨끗이 닦은 가재도구를 들였다. 퀴퀴한 냄새까지 나던 방은 몰라보게 깔끔해졌다. 금이 갔던 벽은 시멘트로 그 틈을 메웠고, 칙칙했던 외벽도 새로 칠한 흰 옷으로 갈아입었다. 전양이 “아빠, 여기 사시는 할머니가 좋아하시겠다”며 전씨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자 “우리 딸, 수고 많았어”라고 대답하는 전씨 얼굴에 함박웃음이 번져 있었다.

글=설승은 기자
사진=김경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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