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엉터리 글로벌 ‘3색 신호등’ … 조현오 청장이 답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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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우
사회부문 기자

화살표 3색 신호등 시범 운영이 시작된 직후인 지난달 21일. 기자는 경찰 관계자를 찾아가 신호등을 갑자기 바꾸게 된 이유를 물었다. 그는 대뜸 종이와 연필을 꺼내 들고 R, Y, A, G를 적었다. 빨강(Red)·노랑(Yellow)·화살표(Arrow)·초록(Green)이 있는 우리나라 4색 신호등 얘기였다. 그는 “이게 R, Y, G가 돼야 하고, 그게 빈 협약의 원칙이며, 교통 전문가들은 다들 그렇게 본다”고 했다. RTOR(Right Turn on Red·빨간 불일 때 우회전), Roundabout(회전교차로) 같은 용어도 쏟아 냈다. 요지는 화살표 3색 신호등이 선진적이라는 거다. 일반 국민은 전문 지식이 없어 잘 모르는데 익숙해지면 참 좋은 제도라는 것이다.

 하지만 유럽과 미국에 10년 넘게 살았던 기자를 비롯해 많은 주한 외국인은 한국 신호등이 외국 신호등에 비해 후진적이라고 느끼지 않는다. 경찰의 ‘전문적인 설명’을 아무리 들어봐도 현행 신호체계가 그렇게 불편하고 비합리적이어서 화살표 3색 신호등으로 바꿔야만 선진 교통체계가 완성되는 것인지 공감하지 못한다는 얘기다. 무작정 바꿔 놓고 익숙해지라니…. 일방통행식 정책 강요도 이런 강요가 없다.

 경찰은 미국 뉴욕의 맨해튼과 독일 베를린에서 찍은 사진을 제시하며 선진국 신호체계의 모델인 것처럼 홍보한다. 하지만 16차로 세종로 네거리와 일방통행 위주의 맨해튼, 협소한 베를린의 거리는 모양이나 환경이 제각기 다르다. 경찰의 글로벌 선진 운운은 설득력을 잃고 있다.

 신호등은 그 어떤 전문 지식보다 국민이 편리하고 안전하다고 느껴야 한다. 특히 이번 신호등 교체는 국회를 거친 법 개정이 아니라 행정부 내에서 일방적으로 시행규칙을 개정한 것이다. 이런 한국적 관행이야말로 글로벌스탠더드에 역행한다.

 경찰은 현재 빨간 화살표 위에 ‘X’자를 넣어 혼선을 줄이는 등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고 한다. 경찰청의 정보·교통·홍보라인 관계자들이 태스크포스(TF)를 꾸려 여론을 수렴하고 있다. 조현오 경찰청장은 틈만 나면 ‘국민 중심 경찰 활동’을 강조해 왔다. 그렇다면 신호등처럼 국민 생활과 직결된 일에 조 청장이 직접 나서야 한다. 신호등 교체에 의아해하는 여론을 충분히 수렴하고 결자해지해야 조 청장의 언행이 일치하는지 국민은 알게 될 것이다. 대국민 정책 강요도 이쯤에서 끝내는 것이 순리다.

박성우 사회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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