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승준 위원장, 미래를 제대로 준비하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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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호 02면

20세기 초 미국 철강왕 카네기 회장이 신입사원 면접을 봤다. 노끈으로 묶은 소포꾸러미를 풀어보라고 했다. 한 지원자는 노끈을 차근차근 풀고 포장지를 얌전히 벗긴 후 알맹이를 꺼냈다. 다른 지원자는 칼로 노끈을 끊고 포장지를 북북 찢었다. 뽑힌 사람은 ‘덜렁이’였다. “시간을 아껴야 한다”는 이유였다. 이 일화를 처음 들은 젊은 시절엔 카네기의 혜안에 탄복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들자 ‘얌전이’에게 마음이 더 갔다. 노끈이야 썩둑썩둑 자르면 되지만, 세상은 노끈 같지 않더라는 경험적 진리를 겪어 봐서다.

김영욱의 경제세상

이 얘기를 꺼내는 건 곽승준 미래기획위원장 때문이다. 참 순진한 사람이란 느낌이다. 칼로 내려치면 세상을 한순간에 바꿀 수 있다고 믿는 듯하니 말이다. 세상의 난마는 질기고 튼튼해 내려친 칼이 튕겨져 나와 그게 자기를 향한다는 걸 모르지 싶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고 대가 없는 선택이 없다는 것도.

사교육 금지, 낙태와의 전쟁, 대기업 길들이기 등 그가 주도한 정책이 다 그렇다. 요란하게 시작했지만 결국에는 세상 이치에 휘둘려 유야무야됐다. 2009년 11월에 벌였던 ‘낙태와의 전쟁’은 누가 봐도 실패할 수밖에 없는 정책이었다(경제세상 2009년 11월 29일자). 대부분의 낙태는 불법이다. 그런데도 낙태를 하는 건 그만큼 절박하기 때문이다. 미혼모, 불행한 결혼생활, 가난, 임신 후 음주, 약물 남용 등등. 낙태를 금지하면 돌팔이라도 찾아가 낙태 시술을 받을 수밖에 없는, 절절한 아픔들이다. 이런 현실을 무시하고 낙태를 엄단하겠다고 덤볐으니 실패는 당연했다.

2009년 4월 시작된 ‘사교육과의 전쟁’. 그는 심야 과외교습을 금지하고, 특목고 입시를 개혁하고, 입학사정관제를 도입해 사교육을 뿌리 뽑겠다고 나섰다. 역대 정권 모두 거창하게 시작했다가 참담하게 깨진 전쟁이다. 정권의 운명을 여기에 걸다시피 한 노무현 정권도 마찬가지였다. 집권 5년간 입시학원 시장은 2~3배 늘었고, 사교육비의 양극화는 더 심해졌다. 대학의 간판효과가 살아있는 한, 아무리 공교육을 강화해도 사교육은 사라지지 않는다. 내 자식만 사교육 시키면 명문대 보낼 수 있다는, ‘죄수의 딜레마’ 이론도 유효하다. 이런 이치를 무시한 채 이 정부 역시 과감하게 대들었지만, 결과는 ‘역시나’였다. 학원 수요는 개인과외로 옮겨졌고, 특목고는 여전히 인기고, 입학사정관제는 의미를 상실했다. 고소득층 자녀만 유리해졌다.

한창 논란 중인 ‘대기업 길들이기’는 더 이상하다. 그는 대기업이 악(惡)인 것처럼 규정했다. 정부보다 더 관료적이고, 현찰이 많은데 투자는 하지 않고, 동반성장은커녕 중소기업 착취만 하고 있다고 했다. “자기들끼리만 잘사는 대기업의 맨얼굴을 드러내 주겠다”고도 했다. 이런 걸 확 뜯어고치기 위해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를 강화하겠단다. 선과 악을 이토록 명료하게 구분하는 독선이 놀라울 뿐이다. 100번 양보해 대기업이 악이라고 치자. 그렇더라도 이렇게 요란 떨 일은 아니다. 의결권 행사는 이미 법적으로 보장돼 있다. 정몽구 회장의 현대자동차 등기이사 등재도 반대한 적 있다. 연금 지배구조를 개선해 관치 우려만 탈색하면 크게 걱정할 것도 없다. 그런데도 이토록 요란한 까닭은? 떠들면 될 일도 안 된다는 세상 이치를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

그가 미래를 기획하는 위원장답게 행동했으면 한다. 단기간에 승부를 내겠다며 가벼이 움직이기에 하는 당부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의 굵고 질긴 난마에 판판이 깨질 거다. 위원회가 본래 할 일도 그것이다. 50년, 100년 후를 내다보는 장기 포석을 둬야 한다. 고려 광종은 그런 사람이었다. 개혁에 거세게 저항하는 지방호족들을 물리치기 위해 두 가지 묘책을 썼다. 노비 양건법을 제정해 호족이 거느리던 노비를 해방시켰고, 과거제를 실시해 호족이 세습하던 관직을 개방했다. 당사자인 호족들은 자신들이 사라지는 줄도 모른 채 붕괴됐다. 세상을 바꾸려면 이래야 한다. 길게 내다보고 무겁게 움직여라. 그러면 이런 묘책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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