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풀도 매달린 반덤핑 카드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16호 34면

최근 미국 상무부가 가전업체 월풀의 청원에 따라 LG전자와 삼성전자의 고급형 냉장고에 대해 반덤핑과 상계관세 조사에 착수했다. 조사 결과 덤핑과 보조금지급이 인정될 경우 두 업체는 징벌적 관세와 함께 그간 공들여 개척한 미국 시장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 지난해 한국의 대미 냉장고 수출은 8억 달러에 달하며, 문제가 된 프렌치도어 모델의 경우 두 회사의 미국 시장 점유율은 60%에 육박한다.

앞으로 상무부와 무역위원회가 300일가량의 조사를 거쳐 관세부과를 결정하게 된다.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할 수 있지만,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드는 데다 WTO의 최종판정 전까지 부과된 관세는 되돌릴 수 없어 상당한 타격이 예상된다. 한국 기업이 왜 무역분쟁의 표적이 되었는지와 비슷한 문제에 대한 예방책을 강구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달라진 한국의 위상과 해외 경쟁자들이 느끼는 위협을 염두에 둬야 한다. LCD TV, 컴퓨터 모니터, 백색가전 등 일부 산업에서 우리 업체들의 주요 시장 점유율은 현지업체는 물론 글로벌 기업들에 위협의 수준을 넘어 해당기업의 존폐를 좌우할 수 있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번에 반덤핑 조사 청원을 주도한 월풀은 세계 최대 가전업체로 한때 우리가 넘볼 수 없던 거인이었다. 그러나 우리 기업들이 에너지 효율이 높고 소비자 취향에 맞춘 제품을 출시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월풀은 급격하게 점유율이 줄어들어 이제는 미국 시장 점유율조차 우리 기업의 3분의 1 정도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처럼 절박한 상황에 내몰린 경쟁자들의 저항과 공세에 대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미국의 통상협상 전략과 분쟁처리 행태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다. 최근 중국과의 수차례 무역분쟁에서 보이듯 미국은 반덤핑조사를 불공정무역 구제 목적이 아니라 시장 환경을 자국에 유리하게 바꾸고 협상에서 상대국을 압박하기 위한 카드로 활용하는 경향이 짙다. 중국은 보복관세와 미국산 제품에 대한 반덤핑 제소 등 다양한 수단을 동원해 가며 미국의 공세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무역 분쟁은 국제경제 문제로 인식되지만 사실 많은 부분이 자국 내 이익집단에 의해 좌우되는 정치적 사안이다. 우리의 대응은 여기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값싸고 품질 좋은 한국산 제품으로 이익을 얻는 미국 소비자단체와 유통업체, 한국에 많은 수출을 하고 있는 기업이나 산업 등 미국 내 이익단체들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 이들을 통해 미국의 정책 형성과정에 압력을 행사하는 것이 한 방법이다.

근본적인 해결책도 있다. 반덤핑의 핵심 쟁점은 해외 판매가격이 국내 시장가격에 비해 낮은지 여부다. 따라서 고부가가치 상품을 제값을 받고 수출하는 경우 반덤핑 제소의 여지는 근본적으로 사라진다. 아울러 한국이나 생산요소 비용이 낮은 중국, 멕시코 등의 대규모 생산기지에서 제품을 만들어 각지로 수출하는 모델은 언제고 반덤핑이나 보조금 시비에 휘말릴 소지가 크다. 미국·EU 등 대규모 단일 시장에는 생산 인프라를 갖추고, 현지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번 사태는 1986년 브라운관 TV 반덤핑 사례 이후 미국이 한국 가전제품에 대해 취한 첫 반덤핑 조치다. 지난 25년간 한국 기업의 글로벌 위상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달라졌다. 많은 기업과 정부가 우리 기업을 질시와 경계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은 당연하다. 실제로 최근 들어 선진국뿐 아니라 개발도상국들로부터 우리 제품에 대한 반덤핑 제소가 느는 추세다.
달라진 시장 지배력과 국력에 맞는 전략적 대응이 절실하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