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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음감 vs 상대 음감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16호 35면

천계영 화백의 만화책 ‘오디션’에 있는 장면입니다. 시골 논두렁을 걷던 송 회장은 주인공 달봉이가 혼자서 아주 특이한 놀이를 하는 걸 발견합니다. 허공에 귀를 기울이는 것처럼 보이던 이 꼬마는 이내 개구리 우는 소리는 ‘도’, 바람소리는 ‘라’, 기차소리는 ‘파 샵’이라 서로 어울린다는 밑도 끝도 없는 소리를 합니다. 소년이 떠난 뒤 땅바닥에 오선지를 그려 그 음들을 적어 본 송 회장은 그제야 이 3개의 음이 디미니시드 코드(감화음, 단3도로 이어지는 화음)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랍니다.

흔히 ‘절대음감’이라고 알려진 희귀한 능력에 대한 작가의 상상력이 한껏 발휘된 재미있는 장면입니다. 절대음감. 이것은 어떤 음을 듣고 그 고유의 음높이를 바로 판별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이 능력의 소유자는 대부분 음악적 재능을 동시에 지녔다고 합니다. 일례로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에서 수학했던 제 친구들의 반 정도가 절대음감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런데 이 절대음감도 사실은 다양하게 구분됩니다. 가장 단순하게는 선천적 절대음감과 후천적 절대음감이 존재합니다. 전자는 말 그대로 태어날 때부터 이 능력을 소유한 것을 가리킵니다. 후자는 처음에 미미했던 능력이 음악을 공부하는 와중에 발전돼 거의 무리 없이 구사하는 수준에 이른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연주하는 악기의 음만 판별하기도 하고, 선율은 판별 가능하나 화성은 불가능하기도 하며, 들어서는 알 수 있으나 자신이 직접 그 음을 상상하지는 못합니다.

선천적 절대음감을 지닌 이들은 보통 이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어떤 악기로 어떤 음과 화성을 들려주어도 무엇인지 알 수 있거니와, 머릿속에 피아노 건반 같은 음고의 기준들이 존재해서 아무 음도 듣지 않아도 혼자서 그 음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유난히 더 발달된 이들은 자연의 소리, 생활 소음의 절대음고도 대략적으로 맞힐 수 있답니다. 저 역시 이런 절대음감을 가지고 있는 터라 어려서부터 이런 음을 맞히는 ‘나 홀로 놀이’를 좋아했습니다. 절대음감이 없는 사람들에게 이것이 마냥 신기하게만 보였는지 그저 귀에 들리는 아무 소리나 대고선 제게 무슨 음인지 맞힐 수 있느냐는 요청(?)도 많이 하곤 했답니다.

차 시동 거는 소리, 문 열리는 소리,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 휴대전화 진동소리 등은 주파수가 대체로 단순해 정신을 집중하면 대략 판별이 가능합니다. 만화 ‘오디션’의 주인공처럼 서로 엮어서 화음을 상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물소리, 바람소리, 발자국 소리, 사람들의 말소리 등은 주파수가 매우 복잡해, 즉 동시에 매우 여러 음을 내기 때문에 몇 개의 음만 판별해내는 게 거의 불가능하고 또 무의미합니다. 여러 가지 색이 한데 섞인 데다 계속 변화하고 있는 어떤 물체를 상상하면 그와 비슷할 것입니다. 막상 이 능력이 필요할 때는 그저 음악을 해석할 때뿐입니다. 특히 자신이 절대음감을 갖고 있던 작곡가들의 음악은 음고 자체에 의미를 가지는 경우가 많죠.

예를 들어 모차르트는 같은 장조지만 장난스러운 분위기에는 ‘다’장조를, 우아한 분위기에는 ‘사’장조를 주로 사용했고, 같은 단조지만 쓸쓸한 느낌은 주로 ‘라’단조로, 격정적인 느낌은 주로 ‘다’단조로 표현했습니다. 또한 ‘내림마’장조는 즐겨 사용한 반면 이의 버금딸림조(4도 위의 조)인 ‘내림가’장조는 평생 거의 사용하지 않았답니다. 반면 베토벤은 이 두 가지를 다 즐겨 사용했고요. 쇼팽은 자신을 ‘바’단조와 가장 닮았다고 표현했다고 전해지는데 그가 가장 마지막으로 남긴 마주르카 역시 ‘바’단조로 쓰였습니다. 작곡가들은 이런 식으로 이미 음계에서부터 자신의 메시지를 일정량 전달하는 셈입니다.

악보를 처음 읽거나 암기할 때도 이 능력은 요긴하게 쓰입니다. 아무래도 모듈레이션의 이해가 빠르고 음색을 상상하는 능력이 더 발달돼 있으니까요.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음악을 공부하려면 이것이 꼭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작곡가 베버·슈만·라벨·바그너 등은 절대음감을 갖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은 연주자 중 대표적인 상대음감의 소유자였습니다.

어쩌면 절대음감은 우리 삶에서 그 존재가 없어도 먹고사는 데 큰 지장이 없는 음악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음악이 의식주로는 채울 수 없는 삶의 에너지인 것처럼 절대음감 역시 더 넓은 음악세계를 보여주는 잠망경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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