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살도 빼고 자신감도 찾고… 한번 빠지면 못 헤어납니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16호 20면

홍수환 관장(오른쪽)이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 있는 홍수환 스타복싱 체육관에서 애제자인 신지은씨의 펀치를 받아주고 있다. 미국 보스턴대를 다니다 휴학 중인 신씨는 “몸의 밸런스를 잡는 데는 복싱이 최고”라고 말했다. 조용철 기자

스포츠 오디세이가 초등학생 시절, 두 살 위 형이 비닐로 만든 권투 글러브를 사 왔다. 우리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모셔 놓고 ‘친선경기’를 했다. 몇 차례 펀치가 오가자 둘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할아버지가 나섰다.
“너거들 머 하노. 와 싸우노.”
“이건 싸움이 아니라 스포츠인데요.”
“서포처?”
“운동이란 뜻입니더.”
“멀쩡한 형제끼리 치고받는 게 머가 운동이고. 당장 때리치아라.”

정영재의 스포츠 오디세이 <8> 헝그리 복싱, 웰빙 스포츠로 진화하다

할아버지의 개입으로 그날의 친선경기는 싱겁게 막을 내렸다.
주먹 권(拳)에 싸울 투(鬪), 권투는 말 그대로 주먹싸움이다. 복싱(boxing)이라고 영어로 표현한대도 ‘주먹질’이라는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권투는 배고픈 스포츠였다. 가진 건 맨주먹뿐인 남자들이 도망갈 곳 없는 링에서 ‘빤쓰 하나 달랑 입고’ 싸웠다. 홍수환ㆍ김태식ㆍ장정구ㆍ유명우…. 기라성 같은 복서들이 한 세대를 풍미했다. 조금 덜 배고픈 사람들은 TV 중계에 열광하며 일상의 고단함을 잠시 잊었다.

“관원 300명 중 100명이 여성”
세월이 흘렀다. 사람들은 ‘권투’라고 하지 않고 ‘복싱’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뒤에 다이어트·에어로빅 같은 단어가 붙은 간판이 늘어났다. 복싱은 다이어트와 건강관리에 아주 좋은 웰빙 스포츠가 됐다. 최근 늘씬한 여배우 이시영이 여자복싱 대회에서 우승하면서 체육관을 찾는 여성과 직장인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반면에 ‘맷값’을 받고 경기에 뛰는 선수는 손에 꼽을 정도가 됐다. ‘헝그리 스포츠’ 권투는 ‘살 빼는 스포츠’ 복싱으로 변하고 있다.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 있는 홍수환 스타복싱 체육관. 면적 150㎡ 정도로 크지는 않지만 강남 요지의 건물 1층에 있어 사람들이 오며 가며 구경하고, 들르기도 한다. ‘4전5기 신화’의 주인공 홍수환 관장은 2006년 이곳에 체육관을 열었다. 관원 300명 중 여성이 100명 정도고 그중에 이시영이 있다. 홍 관장은 “시영이 덕분에 권투 인구가 크게 늘었어요. ‘얼굴 다치면 큰일 나는 여배우도 권투를 하는데 나라고 못할쏘냐’라면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꽤 있거든요”라고 말했다.

잠시 후 깜찍한 외모의 여성이 체육관으로 들어왔다. 이시영이었다. 그는 옷을 갈아입은 뒤 익숙한 동작으로 스트레칭과 줄넘기를 했다. 전날 복싱경기 장면을 담은 CF를 찍었다는 이시영은 “상대역을 맡은 배우가 제 펀치를 맞고 코피가 터졌어요”라며 깔깔 웃었다.

해가 기울면서 체육관에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났다. 3개월째 다닌다는 직장인 이병호(40)씨는 “체중을 줄일 목적으로 복싱을 시작했는데 5㎏ 정도가 빠졌습니다. 남자로서 내 한 몸 지킬 수 있겠다는 자신감도 생겼죠”라고 말했다. 한번 맛보면 빠져나올 수 없는 매력이 있다고도 했다. 중학생인 문유진(14)양은 “친구들이 절 무시하고 따돌리는 게 싫어서 복싱을 배웠어요. 복싱 폼 한번 잡아줬더니 친구들이 꼼짝 못하던데요”라며 어깨를 으쓱했다.

홍 관장은 “권투는 유산소운동과 근력운동이 동시에 되기 때문에 짧은 시간에 다이어트 효과를 얻는 데는 그만”이라고 말했다.

프로복싱 WBC 밴텀급 세계챔피언 출신 변정일씨는 ‘복싱 에어로빅’의 창시자다. 서른한 살 때 군복무를 마친 변씨는 뭘 할지 막막했다고 한다. 그러다 발을 디딘 곳이 에어로빅 체육관이었다. 20대 초반 여성들에 섞여 에어로빅을 배운 그는 ‘복싱과 접목하면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서울 삼양동에 체육관을 만들었다. 여성 샤워장을 더 크게 지었지만 정작 여성들은 오지 않았다. 인맥을 총동원해 홍보를 했고, 방송에 나가면서 여성들이 찾기 시작했다. 지금은 남녀 비율이 6대4 정도라고 한다.

변씨는 “복싱의 기본 스텝을 에어로빅에 접목해 ‘복싱 에어로빅’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여기에 줄넘기와 섀도 복싱 같은 요소가 합쳐지면 재미도 있고 운동 효과도 크지요”라고 소개했다.

복싱은 특히 여성에게 적합한 운동이라고 한다. 웨이트 트레이닝은 당기는 동작이 많은 반면 복싱은 팔을 뻗는 동작이 많아 잔근육이 발달한다. 그래서 마르고 탄력 있는 몸매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30대 이후 남성들이 체육관을 찾는 현상에 대해 변씨는 “세계 타이틀매치를 보며 자랐던 이들에게 복서는 ‘로망’이었다. 좋아했던 복서의 스텝이나 스타일을 따라 해 보면서 즐거움을 느끼고 추억을 되새기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라운드당 10만원 받고 누가 뛸까”
복싱을 재미로 하는 사람이 늘어나는 반면 ‘직업 권투선수’가 점점 줄어들고 스타도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지인진(2005년) 이후 남자 세계챔피언 대가 끊어졌다.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에서 한국의 메달밭이던 복싱에서 금메달 소식이 들린 지 오래됐다. 외로운 링에서 일대일로 맞붙는 ‘원시성’이 사라지고 있음을 안타까워하는 목소리도 있다.

변정일씨는 “링에 오르고 싶어도 1년에 한두 차례밖에 대회가 열리지 않는다. 그나마 라운드당 10만원도 못 받는 열악한 현실에서 복싱에 청춘을 걸 사람이 있을까”라고 반문했다. 홍수환 관장도 “저변이 넓어지다 보면 ‘물건’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답답하지만 한국권투 제2의 전성기를 위해 묵묵히 노력할 뿐”이라고 했다.

홍 관장에게 복싱의 매력이 뭐냐고 묻자 “킬러 본능”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상대를 제압해서 얻는 쾌감보다 자신만의 멋과 즐거움을 위해 샌드백을 두들기는 사람이 많아지는 건 어쩔 수 없는 흐름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