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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같은 세계’ 긴 생명력, 21세기 들어 어린이 현실 직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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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호 10면

내 기억으로는 어린이들의 목소리가 교과서 동요 수준을 벗어나 대중음악계와 만난 것은 1960년대 말 즈음인 듯하다. 뮤지컬 영화의 넘버 ‘도레미송’이 방송국 어린이합창단의 목소리로 울려 퍼지고 TBC가 방영한 ‘황금박쥐’ ‘우주 소년 아톰’ 등 일본 만화영화가 주제가와 함께 히트하기 시작하면서, 아이들은 동요의 세계가 재미없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70년 이탈리아 노래인 ‘검은 고양이 네로’의 번역곡을 당시 여섯 살짜리 박혜령이 깜찍하게 불러 10만 장에 육박하는 초대형 히트를 기록함으로써 이제 어린이는 대중가요 시장의 중요한 요소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어찌 보면 “진달래 먹고 물장구 치고…”로 시작했던 이용복의 ‘어린 시절’의 어린이 목소리는 이러한 흐름 속에 놓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영미의 7080 노래방 <7> 가요 속의 동심

그러나 이런 변화에도 오랫동안 우리 대중가요 속 어린이 이미지는 매우 고정적이었다. ‘어린 시절’은 물론 서수남·하청일의 ‘과수원길’이나 산이슬의 ‘이사 가던 날’ 같은 노래들은 현재의 어린이가 아닌 몇십 년 전 추억 속의 어린 자기 자신을 주로 그려냈다. 한편 이연실의 ‘새색시 시집 가네’ 등은 어린이의 세계를 때 묻지 않은 순수의 세계로 형상화했다.
“수양버들 춤추는 길에 꽃가마 타고 가네 / 아홉 살 새색시가 시집을 간다네 / 가네 가네 갑순이 갑순이 울면서 가네 / 소꿉동무 새색시가 사랑일 줄이야”(이연실의 ‘새색시 시집 가네’, 1971, 김신일 작사·작곡)

아홉 살짜리의 소꿉동무 사랑에 무슨 계산이 있었겠는가. 그것은 타락한 이 세상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을 의미한다. 시간적 배경을 가마 타고 시집가던 시절로 설정하고 있는 것도 지금의 도시생활과 다른,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의 공간을 그리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과거로서의 어린 시절이든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의 표징으로서의 동심이든, 어쨌든 이런 노래들 속의 어린이는 당대 현실 속의 어린이는 아니었다. 당시 우리나라 노래 창작자로 당대 어린이와 직면하고 있는 노래를 지은 경우는 ‘백구’ ‘종이연’(원제 ‘혼혈아’)을 지은 김민기와, ‘산할아버지’ 같은 기발한 상상력으로 아이들을 단박에 휘어잡은 산울림의 김창완뿐이었다.

그에 비해 이 시대 외국 노래의 번역곡들은 달랐다. 순수한 동심을 노래한다 하더라도 ‘검은 고양이 네로’가 보여준 “그러나 너무 너무 장난만 친다 하면 / 고등어통조림을 주지 않겠어요” 같은 생활적 표현이 준 생생함은 번역곡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이었다. 이는 81년의 ‘아빠의 말씀’(원곡 ‘Life itself will let you know’)에까지 이어진다.

아이: (노래) 아빠 언제 어른이 되나요 / 나는 정말 꿈이 커요 / 빨리 어른이 돼야지.
아빠: (토크) 그래, 아가. 아주 큰 꿈을 가져라. 안 된다는 생각은 하지 말아요. 암! 되고 말고. 너는 지금 막 시작하는 거니까. (하략) (정여진·최불암의 ‘아빠의 말씀’, 1981, 지명길 작사·Kipner 작곡)

배우 최불암의 목소리가 사람의 귀를 잡아 끌었거니와 클라이맥스가 “내가 쓰러지면 그냥 놔두세요 / 나도 내 힘으로 일어서야죠”라고 짜랑짜랑 부르는 아이의 당찬 발언이 인상적이었던 노래다. 물론 이 노래 속의 어린이 역시 어른들의 바람이 한껏 들어간 이미지이기는 하지만 당시 한국 대중가요의 어린이상과는 차이가 많았다.

85년 혜은이(사진)의 ‘파란 나라’는 동심의 세계를 그린 한국의 창작곡으로는 정말 오랜만에 대박을 터뜨린 노래였다.
“파란 나라를 보았니 꿈과 사랑이 가득한 / 파란 나라를 보았니 천사들이 사는 나라 / (중략) / 난 찌루찌루의 파랑새를 알아요 / 난 안델센도 알고요 / 저 무지개 너머 파란 나라 있나요 / 저 파란 하늘 끝에 거기 있나요 (하략)”(혜은이의 ‘파란 나라’, 1985, 지명길 작사, 김명곤 작곡)

‘빙글빙글’ 등으로 80년대 중반 최고의 인기 작곡가로 부상했던 뛰어난 건반주자 김명곤의 경쾌한 음악, 여기에 ‘꿈과 사랑’ 같은 상투어가 여전히 많기는 하지만 메테를링크의 ‘파랑새’를 언급한 다소 지적 분위기를 풍긴 가사가, 어른과 아이가 함께 부를 수 있는 대중가요에 목말라하던 방송 쇼프로그램을 만족시킨 셈이다. 하지만 여전히 동심은 ‘천사’의 나라, ‘동화책’과 ‘텔레비전’ 속에 있으나 ‘아무도 가보지 못한’ 이상과 상상 속의 나라로 그려지고 있다. 1920년대 방정환부터 출발한 ‘동심천사주의’는 정말 긴 생명력을 지니고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어린이는 천사가 아니다. 다가오는 어린이날 어떤 선물을 요구해야 자신에게 유리할까를 열심히 계산하며 돈 없는 부모들과 오랜 신경전을 펼치는 영악한 것들 아닌가. 이런 현실적인 아이들의 모습이 대중가요에 나타난 것은 세기가 바뀔 즈음이었다.

“(상략) 안돼 아직 준비도 안됐는데 벌써 성적표가 가면 어떡해 이제 내 인생은 어떡해 안돼 안돼 안돼 안돼 어서 어떻게든 막아야 해 빨리 엄마가 보기 전에 달려가서 내가 먼저 받아야 해 뛰어야 해 뛰어야 해 이번 돌아오는 주말에 새로 나온 자전거 한 대 사준다고 약속했는데 그때까진 어떻게든 버텨야 해 주말까진 어떻게든 버텨야 해 주말만 넘기면 나 자전거만 생기면 나 아무리 혼나도 좋아 (하략)”(량현량하의 ‘성적표’, 2000, 박진영 작사, 방시혁 작곡)

판에 박힌 훈계나 꿈과 사랑 어쩌고 하는 말들이 아이들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음을 솔직히 인정한 이 노래는, 초등학생 가수를 내세워 이미 댄스뮤직의 핵심적 팬으로 부상한 초등학생 또래를 단숨에 사로잡았다. 비록 상업적 기획일지라도 현실성이 주는 충격은 늘 짜릿하다.
이제 4월이 가고 5월이 왔다. 늘어서 있는 날짜들을 보니 한숨이 나온다. 가계부 빨간 글씨 없이 성공적으로 한 달을 영위하시길!


이영미씨는 대중예술평론가다.『흥남부두의 금순이는 어디로 갔을까』와 『광화문 연가』 등 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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