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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합니다'로 대박 터뜨린 개그맨 김영철

중앙일보

입력

잇몸을 드러내며 웃는 긴 얼굴이 유난히 싱거워 보이는 개그맨 김영철(25세). '옷로비 특수' 이후 최진실 ·114안내원 등 잇단 흉내내기 시리즈 개그로 인기를 모으고 있는 그의 인기비결은 무얼까?

지난 한해 동안 국민의 관심을 집중시켰던 사건을 꼽으라면 '옷로비' 사건을 뺄 수 없다. 청문회에 증인으로 나와 온갖 변명을 늘어놓던 고관부인들의 모습을 보고 분개한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닐 것이다. 그 옷로비 때문에 요즘 잘 나가는 개그맨이 있다. KBS 2TV 〈시사터치 코메디파일〉 〈개그콘서트〉 등에서 웃음태풍을 일으키고 있는 김영철.

'미안합니다. 제가 몸이 아파서…' 청문회에 출석한 전 통일부장관 부인 배정숙씨의 떨리는 목소리와 꾀병을 부리듯 찡그린 얼굴 표정을 따라한 것이 유행어가 되었다. 뜻밖의 행운을 잡은 그는 아직도 자신이 '떴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아침을 먹고 있는데 TV에서 청문회 중계방송을 하고 있더라구요. 다른 사람들은 정일순씨 캐릭터가 오히려 더 인상에 남았다고 하던데 이상하게 저는 경상도 사투리에 연신 몸이 아프다고 꾀병을 부리는 배정숙씨 표정이 더 강하게 다가왔습니다."

선배들과 연습을 하던 그는 연신 '미안합니다'를 연발했다. 선배들도 재밌다며 맞장구를 쳐주었다. 하지만 방송을 탈 기회가 좀처럼 오지 않았다. 행운은 정말 우연히 다가왔다. 〈시사터치 코메디파일〉 스타논평 코너에서 옷로비 청문회를 다루기로 한 것. 마땅한 소재가 없어 고민하던 스태프들은 '미안합니다'를 연발하며 연습하던 김영철을 떠올렸다. 전격적으로 출연이 결정되고 그는 게스트 격으로 무대에 올라갔다.

의외로 반응이 좋았다. 방송이 나가고 2주 후 고향인 울산에 내려갔을 때 동네 꼬마들이 그를 따라다니며 '미안합니다'를 외쳤다.

"운도 따랐지만 사람의 특징을 정확히 집어내는 흉내내기 개그가 인상적이었나봐요. 저희 집안이 원래 흉내내기의 달인 집안이거든요. 특히 어머니께서는 이웃분들 흉내를 똑같이 내 동네에서 이름을 날리고 계시죠. 제가 흉내내기 개그로 뜬 것도 다 어머니 덕분이에요."

흉내내기 대가의 집안에서 자라난 그는 어릴 적부터 끼를 발휘했다. 제삿날만 되면 밥상에 올라가 나미, 윤항기 등 가수들 흉내를 내며 노래를 불러 친지들을 즐겁게 했다. 다섯 살, 열 살 차이가 나는 두 누님은 특히 그를 귀여워했다. 그가 여자 흉내를 유난히 잘 내는 것도 누나들과 수다떨던 살아 있는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

고등학교 때는 집이 멀다는 핑계로 야간자습도 '땡땡이'치고 TV만 봤다. 그리고 다음날 학교에 와서는 TV를 못 본 친구들을 위해 온몸으로 재방송을 해주었다. 특히 그 당시 인기를 끌던 드라마 〈질투〉에 나오는 최진실 흉내를 낼 때는 온 교실이 뒤집어질 정도였다.

그가 연예인의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은 대학에 들어가면서부터이다. 동국대 관광경영학과 재학중 KBS 부산가요제에서 입상, 준연예인 대우를 받으며 학교를 다녔다. 과별 응원전 때는 쫄바지에 가발을 쓰고 엄정화의 '포이즌'을 섹시하게 불러 복학생들로부터 사랑을 독차지하기도 했다. 학교 행사의 사회를 도맡아했던 그를 흠모하던 여학생들도 많았다. 그래서 한때 착각에 빠져 탤런트가 될까 생각도 했지만 결국 자신의 외모를 스스로 인정하고 포기했다. 그렇게 끼있는 그였지만 대학교 1학년 때부터 꿈꿔왔던 연예계 진출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93년부터 각 방송사의 개그맨, 탤런트, 심지어 리포터 공채까지 시험을 보았습니다. 물론 모두 떨어졌죠. 그런 저를 보고 어머니께서는 연예인이 되려면 뒤를 봐주는 든든한 사람이 집안에 있거나, 돈이 많아야 한다며 만류하셨어요. 제 얼굴로는 TV에 나가는 것이 불가능하니 많이 고쳐야 하는데 그럴 돈이 어디 있냐고 하시는 거예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본 개그맨 공채시험에 다행히 합격해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지난해 3월 KBS 개그맨 공채시험이 그에게는 정말 마지막 기회였다. 고향인 울산에서 어업을 하고 계신 부모님도 이제는 제발 그만두고 취직이나 하라며 서울로 가는 그를 말렸다. 그렇게 마음 졸이며 시험을 본 그는 14명의 최종 선발자 명단에 올랐다. 6년 동안 품어왔던 가슴 속의 꿈을 이루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의외의 장애물이 그를 가로막았다. 방송국 사정상 14명 중 7명만 다시 선발한다는 것이었다.

최종심사가 있던 날, 남 앞에서 한 번도 떨어본 적이 없던 그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시험과목은 상황묘사. 시험장 분위기를 한번 연기로 묘사해 보라는 것이었다. 흉내내기에 강한 그는 바로 심사위원 개개인의 행동을 모방해 시험장을 한바탕 뒤집어놓았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신인 개그맨 선발 때부터 '미안합니다'로 인기를 모은 지금까지 그에게는 이렇게 항상 운이 따랐다. 그래서 그는 더욱 교만해지지 않으려 애쓴다. 심현섭의 DJ 코너에 출연하고 선배들과 개그콘서트 무대에도 서고 있는 그는 요즘 선배들로부터 열심히 연기지도를 받고 있다. 연습을 하고 있는 선배들을 보고 있으면 '나는 아직 멀었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순간 몰입해서 하는 연기는 자신이 있는데 아직 장면장면을 부드럽게 연결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선배들도 항상 그 점을 지적하죠. 단짝인 심현섭 선배, 백재현 선배가 제 연기수업을 도맡아 해주고 있습니다. 후배 군기 잡을 때는 한없이 무섭지만 솔직한 충고를 해주는 분들은 그래도 선배밖에 없는것 같아요."

'미안합니다'에 이은 최진실, 114 안내원 연기도 선배들의 충고 덕분에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출연하는 프로그램마다 대박을 하나씩 터뜨리고 나니 이제는 CF를 촬영하자는 제의까지 들어온다. 각종 통신회사, 식품회사 광고까지 그를 찾는 광고주가 한둘이 아니다. 요즘은 점심 먹으러 식당에 가면 그동안 밥을 사주던 선배들도 '네가 점심사' 라며 농담을 한다.

서울로 올라온 지 몇 개월 안된 시골뜨기인 그는 아직 서울 시내 구경도 제대로 한 번 못했다. 당분간 신세를 지고 있는 누님댁 근처 홍대앞 거리를 밤늦게 혼자 걸어본 것이 전부다. 일주일에 세 번 방송녹화를 하고 녹화가 없는 날은 선배들과 연습을 하느라 하루도 쉬는 날이 없기 때문이다.

정신 없이 하루를 보내다가 누님 댁으로 돌아올 때면 여러가지 생각이 머리 속을 맴돈다. 신인시절부터 개그프로에서 비중있는 역할을 하는 자신이 대견스럽기도 하지만 이러다가 한순간 밑으로 떨어져버리는 것은 아닌가하고 걱정이 된다.

"선배들이 그러더라구요. 아무리 인기있는 연예인도 어느 순간 슬럼프를 맞게 된다고…. 아직 신인인 제가 벌써부터 그런 걱정을 하는 게 어떨지 모르겠지만 견디기 힘든 때가 오더라도 최선을 다해 정말 열심히 할 겁니다. 지금은 선배들이 제 연기를 뒤에서 받쳐주고 있지만 앞으로는 선배들의 개그를 잘 받쳐주는 그런 연기를 하고 싶어요."

장난기 어린 그의 표정 뒤에 숨어 있는 진지한 연기자의 자세가 듬직하게만 느껴진다. 타고난 춤솜씨와 가요제에 출전한 노래실력을 살려 뮤지컬에도 도전해보고 싶다는 개그맨 김영철. 한없이 익살스런 그의 얼굴에서 또 어떤 표정과 연기가 쏟아져 나올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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