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국민연금 의결권 강화”, 정체성 버리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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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곽승준 미래기획위원장이 엊그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를 강화하겠다고 했다. 말만 놓고 보면 틀린 얘기는 아니다. 주식을 갖고 있는 기업의 주주총회에 참석해 ‘1주 1표’ 원칙에 따라 의결권을 행사하는 건 당연하다. 문제는 발언 의도다. 곽승준 위원장은 ‘대기업 길들이기’가 목적이라는 걸 분명히 했다. “거대 권력이 된 대기업을 견제하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사용하겠다는 것이다. 참으로 불순한 발언이다. 정부 말을 잘 듣지 않으니 의결권을 통해 혼내겠다는 것이다. 국민연금의 주인이 정부라고 착각하고 있지 않다면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발언이다.

 국민연금의 주인은 정부나 공단이 아니라 국민이다. 생활 안정과 안락한 노후를 위해 국민이 낸 돈이 국민연금이다. 국민연금공단의 설립 목적 역시 “연금 급여를 실시함으로써 국민의 생활 안정과 복지 증진에 이바지하는 것”이다. 어디에도 “정책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거나 “대기업을 길들이기 위해서”라는 말은 없다. 대기업을 길들이기 위해 국민연금의 돈을 쓰겠다면 국민으로부터 사전 동의를 받아야 한다. 특정 기업을 혼내겠다는 목적으로 주식을 왕창 샀다가 큰 손해를 본다면 정부가 책임을 질 것인가.

 국민연금 의결권 행사의 물길을 튼 노무현 정부도 이렇게 막가진 않았다. 2005년 말 행사 지침을 만들면서 ‘연금 가입자 및 수급자에게 이익이 되도록’ 의결권을 행사하겠다고 했을 뿐이다. 대기업 하는 짓이 아무리 맘에 안 든다고 해도 그 수단이 국민연금이어선 안 된다. 대기업의 지배구조 개선과 국민의 노후생활 보장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또 하나 우려되는 건 관치(官治)의 폐해다. 의결권을 행사하는 주체는 형식상 국민연금 기금운영위원회이지만 실제로는 정부다. 의결권을 행사할 때 정부와 정치권의 입김이 거셀 수밖에 없는 구조다. 주식을 한 주도 갖고 있지 않은 포스코와 KT, 시중은행의 경영진 인사도 정부가 주무르고 있는 판국이다. 하물며 국민연금이 주식을 갖고 있는 대기업에 대한 간섭은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국민연금을 무기로 기업의 운영을 좌지우지하겠다는 것은 사회주의로 가자는 것이나 다름없다. 치열한 국제 경쟁시대에 정부가 기업의 투자방향까지 결정하는 구조로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이다. 순수한 의도로 의결권을 행사하겠다고 다짐해도 걱정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겠다던 이 정부의 정체성(正體性)과도 맞지 않다. 굳이 의결권을 강화하려면 정부와 정치권의 입김과 압력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구조부터 만드는 게 먼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