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넥스 무비라고요?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다고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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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 고맙다, 미안하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가까운 사람들에게 이런 말들을 하게 될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의 원작자 노희경(오른쪽) 작가와 영화를 만든 민규동 감독이 바라는 바다. [안성식 기자]


1996년 방영된 노희경 작가의 단막극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은 아직도 드라마 팬들이 수작으로 꼽는 작품이다. 치매 걸린 시어머니(김영옥)를 정성껏 돌보던 며느리(나문희)가 불치병에 걸려 원치 않는 이별을 하는 내용이었다. 절절한 대사와 열연에 눈물을 쏟지 않기란 여간해선 어려웠다. 빼어난 작품성에 비해 시청률은 높지 않았던 노 작가에게 ‘제2의 김수현’이라는 별칭을 선사했던 작품이기도 하다.

 연극과 소설로도 나왔던 ‘세상에서 가장…’이 이번엔 영화로 선보였다.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등으로 섬세한 구성력을 인정받았던 민규동 감독이 각본·연출을 맡았다. 노 작가는 “포스터에 내 이름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하나도 서운하지 않다. ‘세상에서 가장…’은 노희경이 아니라 민규동의 작품”이라며 만족감을 표했다.

 노희경(45) 작가와 민규동(41) 감독을 만났다. 15년간 롱런하는 ‘세상에서 가장…’의 콘텐트 파워는 어디서 나올까. 이들은 ‘엄마의 힘’에 입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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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규동=늘 영화로 한 번은 만들어봐야지 했던 소재가 엄마 얘기였어요. 지난해 신경숙 작가의 『엄마를 부탁해』를 읽은 게 계기가 됐어요. ‘엄마는 태어날 때부터 엄마인줄 알았다’‘엄마는 알고 있었을까, 나에게도 일평생 엄마가 필요했다는 걸’ 같은 문장이 가슴에 남았죠. 그때 이 드라마가 떠올랐어요. 대본을 읽어 보니 세월이 그렇게 흘렀는데도 여전히 강렬한 에너지가 느껴졌어요.

 ▶노희경=어머니가 위암으로 돌아가시고 2년 후에 쓴 작품이에요. 가족에게 헌신하다 암으로 죽는 주인공 인희(나문희)를 보며 어머니 생각을 수없이 했어요. 그런데 영화에선 인희가 꼭 나처럼 느껴졌어요. 내 친구 배종옥이 연기해서 그런가? 난 저렇게 죽음을 준비할 수 있을까 싶더군요. 사실 시나리오 봤을 땐 좀 유치해서 빼면 안되냐고 했던 장면이 있어요. 인희가 시어머니(김지영) 목을 조르고 나와서 벽에 기대 “착한 일도 하고 봉사도 하고 산다고 약속한 거 안 지켜서 벌 받았다”고 우는 장면인데, 막상 보니 예상 밖이었어요. 내가 죽음을 맞을 때도 저렇게 과거에 했던 약속이 마음에 걸리겠구나 싶고.

 드라마와 달라진 건 주인공 부부의 연령이 낮아진 점과, 고부에 집중되던 이야기가 가족 구성원에게 골고루 나뉘어졌다는 점이다. ‘레슬링’‘이종격투기’‘기계체조’ 등 다양한 별명이 붙은 격한 승강이를 보여주는 근덕(유준상)과 선애(서영희) 커플은 그 중에서도 도드라진다.

 ▶민=인희는 가족구성원을 주체적으로 살게 만들고 반성하게 하는 일종의 은유적인 존재죠. 실제로 엄마는 이래야 다 바쳐야 돼, 하면 아무도 엄마 안 하려고 할 거에요.

 ▶노=엄마의 희생에서 엄마의 영향력이 나온다고 봐요. 엄마라는 존재가 가족 전체에 변화를 주잖아요. 요즘 젊은 여성들은 그렇게 안 살려고 하겠지만. 아니, 그런데 엄마가 밥 안 하면 그럼 뭐 하는데?(웃음) 우리는 그 밥을 먹고 자라 엄마가 꿈꿨던 세상을 만들어가는 게 아닐까요.

 하지만 무심한 자에게 만회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게 인생이다. 인희의 아들(류덕환)은 엄마의 발병 소식에 흐느끼며 말한다. “효도하고 싶었어요.” 아빠(김갑수)가 대답한다. “그래, 우리 모두 잘해주고 싶었지.”

 ▶민=관객평 중에 ‘영화 보고 나서 엄마한테 전화했다’는 글이 많았어요. 이 영화를 보고 ‘사랑한다’‘고맙다’‘미안하다’는 말 한마디가 나와 내 가족, 내 친구에게 의미를 줄 수 있다는 걸 느낀다면 좋겠어요.

 ▶노=내 나이 또래 엄마들이 ‘나 괜찮게 살고 있구나, 인희처럼 가족들에게 사랑을 아주 많이 주면서 살고 있구나’ 위안을 받았으면 싶어요. 인희의 희생과 불행보다 아름답고 찬란한 마무리를 눈 여겨 봐줬으면 해요. 이 영화 보고 ‘난 저렇겐 안 살아’라고 다짐한다면 어리석은 거에요.(웃음) 인희처럼 나눠주고 살아야 우리가 엄마란 존재한테 끊임없이 감동받지 않을까요.

 민 감독은 “시나리오 쓰면서 내내 뒹굴면서 울었다”지만, 영화는 억지눈물을 뽑아내지 않으려 가다듬은 매무새다. 그럼에도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 탓에 ‘익스트림(extreme) 고통멜로 드라마’‘전형적인 크리넥스 무비’란 평이 나온다. 신파라는 얘기다.

 “엄마가 죽는데 왜 안 울어요? 그게 정상인가요? 신파가 욕을 먹고 냉소와 세련이 칭찬 받는 현실이 더 무섭다고 생각해요.”(노) “뤼미에르 형제가 ‘열차의 도착’(1895년)을 만들었을 때 사람들이 기적 소리에 놀라서 도망갔었죠. 100년이 넘은 지금은 아무도 그러지 않아요, 가짜란 걸 아니까. 영화가 가짜이고 허구라는 걸 알면서도 그 순간 마음이 움직여 눈물을 흘릴 수 있다면, 격정과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다면 의미있는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민)

글=기선민 기자
사진=안성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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