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조 달러 빚더미 USA … 시장이 오바마에게 경고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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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너 하원의장(左), 루빈 전 재무장관(右)

세계 1등 국가 미국의 경제 리더십이 도전받고 있다. 2008년 금융위기 후 불거진 눈덩이 재정적자와 국가부채 위기를 제대로 수습하지 못해서다. 세계 3대 신용평가회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18일(현지시간) 미국 국가신용등급 전망을 ‘안정적(stable)’에서 ‘부정적(negative)’으로 강등했다. 최고등급인 ‘AAA’ 신용등급은 유지하되, 앞으로 6개월~2년 안에 위기 수습방안을 내놓지 못하면 신용등급도 깎을 수 있다는 경고다. 비록 전망이긴 하지만 미국의 신용등급이 강등이란 상처를 입은 것은 1941년 S&P가 국가신용등급을 매기기 시작한 이후 처음이다.

S&P의 조치는 연초부터 예견됐다. 지난해 말 버락 오바마(Barack Obama) 대통령이 조지 W 부시(George W. Bush) 정부 시절 만든 부자 감세 법안을 연장하라는 공화당 요구를 수용한 게 결정적 단초였다. 당시 S&P는 물론 무디스도 미국 국가신용등급 전망을 강등할 수 있다고 수차례 경고했다. 오바마 정부와 정치권이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해 머리를 맞대기는커녕 세금을 깎아주는 조치부터 연장하자 미국의 경제 리더십에 의문을 던진 것이다. 그리고 이날, 말로 경고해도 소용이 없자 S&P가 먼저 행동으로 옮긴 것이다.


 2008년 금융위기 후 AAA등급 국가 중 S&P의 경고장을 받은 건 영국이 먼저였다. 재정적자가 계속 불어나자 2009년 5월 S&P는 영국의 신용등급 전망을 ‘부정적’으로 강등했다. 그러자 데이비드 캐머런(David Cameron) 영국 총리는 부랴부랴 적자감축 대책을 마련해 야당의 동의를 극적으로 이끌어냈다. 공무원 50만 명 감축과 대대적인 복지비 삭감이 뒤따랐다. S&P는 이를 평가해 5개월 만인 그해 10월 영국의 신용등급 전망을 원상회복시켰다.

 이와 달리 오바마는 늑장을 부렸다. 당장 발등에 떨어진 금융위기 수습에 급급해 재정적자 감축은 뒷전으로 미뤘다. 오바마는 오히려 건강보험 개혁과 월가 손보기에 전력투구했다. 그 사이 재정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었다. 2009년 1조 달러가 넘어선 미 재정적자는 올해 1조6500억 달러에 달할 전망이다. 국내총생산(GDP)의 11% 수준이다. 그러자 지난해 11월 중간선거에서 오바마 경제 리더십에 첫 위기가 찾아왔다. ‘작은 정부’를 내세운 강경보수파 ‘티파티(Tea Party)’가 돌풍을 일으킨 것이다. 티파티 바람은 공화당의 하원 장악을 불렀다.

 하원에 교두보를 마련한 공화당은 사사건건 오바마의 발목을 잡았다. 이 때문에 S&P는 오바마와 공화당 지도부가 재정적자와 국가부채 위기 수습방안을 2013년 이전에 합의해내기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다. 당장 14조2190억 달러까지 늘어난 국가부채는 법으로 정한 한도 14조2940억 달러(약 1경5580조원)의 턱밑까지 찼다. 5월 16일이면 한도도 바닥난다. 비상조치를 다 동원하더라도 7월 8일 이전에 의회가 한도를 증액해주지 않으면 기술적으로 미 국채는 부도 상태가 된다. 이는 국제금융시장에 2008년 리먼브러더스 파산보다 더 큰 파장을 불러올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도 오바마와 공화당을 이끌고 있는 존 베이너(John Boehner) 하원의장은 서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고 있다. 양쪽은 앞으로 10년 동안 재정적자를 4조 달러 규모로 줄이자는 데는 대체로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어디서 줄이느냐가 문제다. 내년 대통령선거를 의식해서다. 베이너는 오바마의 표밭인 서민 예산을 깎으라고 요구하고 있다. 노인·저소득층 의료보험과 사회보장비 지출을 오바마 손으로 확 깎으라는 것이다. 이에 맞서 오바마는 부자 증세 카드로 베이너를 압박하고 있다.

S&P 발표 후 오스탄 굴스비 백악관 경제자문위원장은 CNBC 등 방송에 출연해 “S&P의 결정은 정치적 판단”이라고 주장했다. 제이 카니 백악관 대변인도 “클린턴 대통령이 의회와 재정적자 타협안을 타결시켰듯이 오바마 대통령도 합의를 이끌어낼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클린턴 행정부 때인 1996년 로버트 루빈 재무장관이 신용평가사의 등급 하향 경고를 공화당 압박 카드로 역이용해 등급 강등 위기를 벗어난 예를 두고 하는 말이다. 백악관도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조셉 바이든 부통령은 21일 민주·공화 양당 지도부와 적자 감축을 위한 첫 대책회의를 열 계획이다.

 미국의 경제 리더십이 이대로 주저앉지는 않을 것이란 전망도 많다. 무디스는 지난 8일 밤 오바마와 베이너가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에서 2011회계연도 예산안 협상을 극적으로 타결해낸 것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구겨진 미국의 자존심이 얼마나 빨리 회복되느냐는 이제 오바마와 미국 의회의 리더십 재건에 달린 셈이다.

뉴욕=정경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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