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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수 해커 필리핀에 있다” … 필코 프로젝트 시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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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지난해 12월 필리핀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허모(40·무직)씨는 꿈에 부풀었다. 난생 처음 가보는 필리핀도 기대됐지만 오랜 지기 정모(36)씨가 ‘대박을 낼 사업 제안’이 있다고 말한 것이다. 정씨는 허씨가 2004년 인터넷 광고대행업을 할 때 고객으로 처음 만나 친분을 쌓아온 ‘사회 친구’였다.

 정씨는 필리핀 현지에 도착한 허씨를 고급 술집에 데려갔다. 술이 서너 순배 돌자 정씨는 허씨의 손을 잡고 회심의 제안을 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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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에서 대형 포털 사이트를 해킹했던 유명한 해커가 지금 필리핀에 도피해 있다. 해커에게 2000만원 정도를 주고 지명도 있는 한국 회사의 개인정보망을 해킹하면 큰돈을 벌 수 있다.”

 정씨가 말한 유명 해커는 2007년 포털 사이트 다음을 해킹해 4만여 명의 회원 정보를 빼내고 필리핀으로 도주한 신운선(37)씨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는 KT 전산망도 뚫었었다.

 이른바 ‘필코(Philko·필리핀-코리아) 프로젝트’는 이렇게 시작됐다. ‘기획=정씨, 연출=허씨, 주연=신씨’의 초대박 해킹 프로젝트였던 것이다. 허씨는 이후에도 수시로 필리핀으로 날아가 정씨와 범행을 모의했다. 지난달 말에는 역시 광고대행 고객으로 알게 된 조모(47)씨로부터 2000만원을 빌려 필리핀에 있는 정씨에게 송금했다. ‘해킹 착수금’ 명목이었다. 정씨를 통해 돈을 넘겨받은 해커 신씨는 현대캐피탈 고객 정보를 해킹한 뒤 ‘5억원을 송금하라’는 협박 e-메일을 현대캐피탈 측에 보냈다. 현대캐피탈 측이 신씨가 알려준 계좌로 일단 1억원을 부치자 허씨와 조씨, 조씨의 애인 등 3명은 은행을 돌며 총 3600만원을 인출했다. 허씨는 다시 필리핀으로 갔다. 600만원은 필리핀에서 정씨가 인출했다.

 허씨는 현대캐피탈로부터 받은 돈을 유령 법인 명의 계좌에 예치하는 치밀함도 보였다. 허씨가 현금 인출 과정에서 사용한 유령법인 계좌 중 2개는 충남지역 조직폭력배인 ‘연무사거리파’로부터 사들인 것이었다.

 한국에서 현대캐피탈 고객 정보 해킹 사건이 연일 톱뉴스로 보도되자 허씨는 불안해졌다. 한국 경찰에서 로밍 폰을 통해 연락이 왔다. 허씨가 사용한 대포폰 4대를 추적하던 경찰은 허씨에게 40만원을 받고 대포폰을 만들어 준 40대 여성을 추궁한 끝에 허씨의 신원을 확인했다. 허씨 등이 은행 현금인출기에서 돈을 인출하는 모습이 폐쇄회로TV(CCTV)에 포착되기도 했다.

 경찰은 허씨에게 “문제를 해결하려면 일단 국내에 들어와야 되지 않겠느냐”고 설득했다. 허씨는 “나는 정씨 얘기를 듣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돈을 부쳤을 뿐 해킹 자체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다. 필리핀에는 자동응답서비스(ARS) 사업을 하기 위해 왔다”고 말했다.

 고심을 거듭하던 허씨는 18일 오전 6시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하다 공항경찰대에 체포됐다. 서울경찰청 사이버범죄수사대는 이날 허씨에 대해 공갈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필코 프로젝트가 허무하게 실패하는 순간이었다. 허씨가 돈을 인출할 때 운전을 해 준 류모(39)씨는 이미 구속됐다. 류씨는 허씨와 같은 동네에 살아 2008년께부터 친분을 쌓아온 상태였다.

 한편 정씨는 필리핀에 머무르고 있다. 해커 신씨는 2007년 필리핀으로 도주한 뒤에도 국내 통신업체 등을 현지에서 해킹하는 등 대담해진 상태다. 현지 교포들에게 자신의 해킹 실력을 자랑하고 다닌다고 한다. 인터폴 적색 수배(red notice)를 받고 있기도 하다. 경남 김해시 장유면에 살던 신씨는 부인, 두 자녀와 함께 필리핀에서 생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밖에 허씨가 해킹 착수금 2000만원을 빌린 조씨는 중국에 체류하고 있다. 이번 범행에 가담한 조씨의 애인은 중국 동포다. 경찰은 이들을 검거하기 위해 인터폴에 국제공조를 요청해 놓은 상태다.

 ◆검거된 퇴직자는 이번 사건과 무관=현대캐피탈 해킹 사건에 내부 공모자가 있을 것으로 보고 수사해 오던 경찰은 지난해 12월 퇴사한 김모(36)씨 등 5명을 18일 입건해 조사했다. 하지만 이들은 이번 사건과 무관한 것으로 드러났다. 현대캐피탈 해킹 사건이 없었다면 검거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경찰에 따르면 현대캐피탈의 리스자동차 정비시스템 부문 전산 담당자로 근무하던 김씨는 지난해 12월 현대캐피탈의 경쟁업체인 A사로 이직했다. 이후 올해 2월까지 총 여섯 차례에 걸쳐 현대캐피탈 전산망에 침입한 것으로 조사됐다. 김씨는 현대캐피탈에 근무할 당시 동료였던 김모(36)씨를 통해 현대캐피탈의 통합견적 출력시스템을 캡처한 자료를 빼냈다고 경찰은 전했다. 또 현대캐피탈에 파견 근무 중인 모 보험사 직원은 같은 자료를 빼내 또 다른 김모씨에게 건넨 혐의로 입건됐다.

 경찰 관계자는 “퇴사 직원 김씨 등이 유출한 자료는 해킹된 자료와 다른 것이고 해킹사건 피의자들과의 공모 여부도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박성우·심서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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