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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과 분쟁의 20세기 복지유럽 탄생시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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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유럽은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과학이 빈곤과 고통을 종식시킬 것으로 기대됐으며, 전기·철도·전신은 유럽 대륙을 한데 묶어주고 있었고, 통신과 경제발전으로 민족주의와 민족 분쟁은 시들해질 것으로 예상됐다. 가공할 현대 무기는 전면전을 생각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중부 유럽은 기술·철학·문학·음악·미술에서 꽃을 피울 참이었다. 20세기는 독일의 세기가 될 것으로 간주됐다.

그 대신 유럽은 오히려 20세기의 킬링 필드가 됐다. 그 어느 시대보다 더 많은 유럽 사람들이 고향에서 쫓겨나고 투옥됐으며 노예가 되거나 고문을 당하고 죽었다. 유럽은 공산주의와 나치즘이라는 두 개의 대중적 사회공학 실험실이 됐다. 그 실험은 완전히 실패해 19세기의 원대한 계획들을 격하하고 붕괴했으며 환멸과 고갈만 쌓여 갔다.

그러나 유럽은 20세기 후반의 축소된 기대 속에서도 독창적이고 중요한 무엇인가를 건설했다. 바로 복지국가다. 19세기의 유럽인들은 산업혁명에 따른 막대한 부와 유례없는 정치적 자유를 통해 세계를 주도할 수단과 다른 지역 국가가 부러워하는 혜택을 얻을 수 있었다. 1945년 이후 서유럽은 또다시 세계가 이상형으로 삼는 매력적인 업적을 이뤄냈다. 경제적 자유와 사회적 책임의 복합체인 복지국가가 바로 그것이다.

21세기 유럽이 직면할 도전은 경제적 혁신을 금하거나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사회적 보호와 정치적 안정이라는 모델(의료·보험·연금·대중교육·공공서비스의 제공)
을 보존하고 향상시키는 것이다. 이 난제는 대개 세계화의 딜레마이면서도 기회로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그런 예측은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 세계화에 따르는 희망과 두려움은 착각에 불과한 것으로 판명될 지도 모른다.

우리는 19세기의 선조들처럼 과거를 떨쳐버린 것으로 상상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과연 과거를 묻어버릴 수 있을까. 유럽인들이 최근 수십 년간 유럽 대륙에 복지와 안정을 가져다 준 복지국가를 이룩할 수 있었던 이유는 과거의 재난 덕분이다. 전쟁, 불황, 극우파와 극좌파의 성공을 통해 유럽은 자유민주국가의 존속을 위해서는 국민들이 편견과 종말론적인 환상의 유혹에 빠져들지 않도록 공공 서비스와 물질적인 보장을 제공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이것의 달성을 위한 조건은 30년간의 유례없는 경제적 성장이었으며 그동안 서유럽은 번영과 고도로 발달한 사회적 안전장치에 익숙해졌다. 요즘 유럽은 부를 창출하는 자유 시장의 미덕과 사회적 고비용이 따르는 정치적 혜택을 두고 선택의 기로에 놓인 듯하다. 정부 지출을 삭감하느냐 아니면 지속되는 경기 침체를 감수하느냐, 미국식 성장이냐 유럽식 경화증이냐 사이의 양자택일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경제적 고효율에도 부정적인 면이 있다. 복지국가의 해체에 따르는 정치적 비용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계화가 새 천년을 맞이하는 하나의 슬로건이라면 또다른 슬로건은 민족국가의 종언이다. 그러나 그것은 성급한 예측이다. 유럽의 정치평론가들은 살인적인 국가총동원과 분쟁의 한 세기를 보낸 뒤 출현한 유럽연합(EU)
을 초국가적 정체성의 시대로 진입했다는 증거라며 환영했다. 그러나 실상 유럽 대륙은 지금도 여러 다른 언어·기억·연상·지역사회가 혼재돼 있다. 물론 자급자족하는 폐쇄적인 작은 국가의 시대는 이제 제 명을 다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개별적인 국가는 계속 존속될 것이다.

유럽연합은 개념상으로든, 통치체제로든 추상적이며 깊이가 없다. 공통된 기억을 전혀 만들어낼 수 없으며 안정된 과거에 대한 대안이 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앞으로 힘든 시절이 닥치면 유럽연합이 어떻게 버텨낼지, 국가가 제공하는 서비스가 감소되고 경제적인 불안이 확산된다면 유럽인들이 어떻게 느낄지 의문이다. 불확실성을 막아줄 기존의 민족 국가가 존재하지 않을 때 발생하게 될 일이 불안의 원천이다. 최근 유럽 전역에서 선거를 통해 민중 정치가 급부상하고 있는 것이 그 증거다.

이런 것들은 불안의 근거가 된다. 그러나 낙관주의의 근거도 있다. 오늘날의 유럽은 초국가적 체제와 번영을 구가하는 나라들, 자본주의 시장과 복지 국가들이 우연하게 잘 혼합돼 있는 상황이다. 우연한 상황이 하나의 모범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은 세계 사람들이 매력을 느끼는 모델로 남게 된다. 그러나 미래 예측은 위험한 일이다. 1900년 프랑스에서는 드레퓌스 사건이 종결돼 가고 있었다. 대다수 사람들에게 그 사건이 풍기는 유대인 혐오증의 냄새는 창피한 과거를 기억시켜주는 마지막 불미스러운 상징으로 비쳤다. 그러나 최근 발칸반도에서 발생한 사건에 대해서도 유사한 해석이 내려졌다. 21세기로 진입하면서 우리는 과연 무엇이 끝나고 무엇이 시작됐는지 장담할 수 있을까.

Tony Judt
뉴스위크한국판(http://nwk.joongang.co.kr) 제 410호 1999.12.29/20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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