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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는 도로의 ‘뼈아픈 실패’ 되새겨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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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호 34면

3년 전쯤 국토해양부의 한 과장급 공무원에게서 들은 얘기가 떠오른다. 그는 직전에 지방의 국도유지사무소장을 거쳤다. “현장 점검을 나가면 도로가 구석구석 너무 잘 닦여있어요. 그런데 한두 시간을 달려도 마주 오는 차를 구경 못할 때도 있더군요.” 차도 거의 안 다니는 도로에 돈을 너무 많이 썼다는 말이었다.

강갑생 칼럼

수십 년간 국내 사회간접자본(SOC) 투자는 도로 분야에 집중돼왔다. SOC 예산의 50~60%가 도로 몫이었다. 표를 위해 자기 지역에 앞다퉈 도로 사업을 유치한 지역 정치인들도 한몫 거들었다. 1970년대 초반 4만㎞였던 국내 도로 연장은 이제 10만㎞를 훌쩍 넘어섰다. 같은 기간 철도는 고작 200㎞가 늘어난 3400㎞에 불과하다.

과장을 섞자면 자고 나면 새로운 도로가 생겨나는 형국이었다. 수요는 그다지 고려되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가을철 도로에 고추를 한바닥 널어놓고 말려도 문제가 없을 정도였겠는가.

더 심한 건 중복 투자였다. 이미 도로가 있는데 거의 같은 노선의 도로를 또 뚫는 것이다. 문경새재를 관통하는 이화령 터널과 주변 3번국도가 그랬다. 중부내륙고속도로가 나란히 달린다. 겹치는 노선 길이만 74㎞나 됐다. 하루 4만3000대가 다닐 거라던 이화령 터널은 중부내륙고속도로 탓에 통행량이 2800대로 급감했다. 정부는 하는 수 없이 민자사업자에게 600여억원을 주고 터널을 인수했다. 2008년 한국교통연구원의 연구 결과를 보면 당시 건설 중이거나 계획 중인 고속도로와 국도 가운데 중복 투자된 구간은 8개 노선 320㎞나 됐다. 예산 낭비만 8조6000억원에 달한다는 지적이었다.

도로의 과도한 투자는 역풍을 몰고 왔다. 지난해 6월 대통령이 참가한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 회의에서 도로 건설의 중복·과다 투자 문제를 줄이기 위한 ‘도로사업 효율화 방안’이 마련됐다. 도로 투자를 최소화하고 예전보다 더 보수적으로, 꼼꼼하게 따지겠다는 내용이었다. 지난해 짜인 올해 정부 예산안에선 도로의 신규사업이 모두 배제됐다. “건국 이래 초유의 사태”라는 말도 나왔다.

도로 문제를 장황하게 얘기한 건 철도 얘기를 하고 싶어서다. 도로가 밀려난 자리를 지금 철도가 차지하고 있다. 정부는 철도 투자 비중을 확대해 2020년까지는 SOC 투자의 절반까지 올린다는 계획이다. 이달 초에는 88조원 규모의 제 2차 국가철도망구축계획도 발표했다. 지·정체 없이 대량수송이 가능하고, CO2 배출도 적은 철도야말로 현 정부가 내세우는 녹색성장에 걸맞은 교통수단이라는 게 투자 확대에 대한 설명이다. 선진국에서도 철도 투자를 늘리고 있으니 방향은 잘 잡은 듯하다.

문제는 철도 투자가 급격히 확대되면서 도로의 대표 부작용이었던 중복투자가 우려된다는 점이다. 수도권광역급행철도(GTX)가 그렇다. 정부는 국가철도망구축계획에서 경기도가 제안한 GTX 3개 노선을 동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3개 노선에는 13조원이 투입되고 이르면 2018년께 완공된다. 민자가 60%, 국고와 지자체에서 나머지를 부담한다.

GTX는 경기도가 제안할 당시부터 중복 논란이 있었다. 킨텍스~서울역~판교~동탄을 잇는 1노선(74.8㎞)의 경우 킨텍스~서울역 구간은 경의선, 서울지하철 3호선과 겹친다. 서울역~판교 구간은 신분당선(판교~강남), 지하철 3호선과 중복된다. 송도~신도림~용산역~청량리 간 2노선(49.9㎞)은 국철 1호선(인천~서울역), 신안산선(안산~청량리) 구간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의정부~청량리~과천~금정 간 3노선(49.3㎞)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지난해 9월 한국교통연구원이 발표한 수도권광역급행철도 타당성 조사 자료에서는 2조원 넘게 투입된 경의선 복선전철은 GTX에 승객을 30% 이상 뺏길 것으로 예상됐다. 1조 2000억원을 들여 강남역~정자역을 잇는 신분당선도 20% 넘게 승객이 줄어든다. 피해는 서울지하철은 물론 안산선, 국철 1호선, 분당선, 경원선 등 대부분의 수도권 전철에까지 미친다는 전망이었다. 전문가들은 다른 철도망 계획에도 이런 중복 우려가 있다고 지적한다.

상황이 이런데도 정부는 철도의 중복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중복 문제는 노선이 개통되면 그냥 눈에 드러난다. 겹치는 노선을 달리는 텅 빈 열차가 그것이다. 이제 막 철도 투자 좀 하려는데 너무 재 뿌리는 것 아니냐는 반발도 나올 것이다. 하지만 초기부터 계획을 바로 세우고 추진해야 한다. 그래야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 우를 피할 수 있다. 세금이든, 기업자금이든 아까운 돈을 제대로 쓰자는 얘기다. 그래서 도로처럼 욕먹지 말라는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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