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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판 오나시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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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1968년 10월 20일 세계인의 눈은 이오니아해(海)에 떠있는 그리스의 작은 섬 스코르피오스(Skorpios)에 쏠렸다. ‘선박왕’ 아리스토텔레스 오나시스(Aristotle Onassis·1906~75)와 재클린 케네디(Jacqueline Kennedy·1929~94)가 ‘세기의 결혼식’을 올렸다. 환갑을 넘긴 세계 최고의 부호와 30대 후반의 미국 퍼스트레이디 출신 미망인의 결합은 선망과 질투, 호기심을 두루 자극했다. 당시 재클린은 세련된 패션감각과 미모·지성을 겸비한 뉴스메이커였다. 지금의 프랑스 대통령 부인 카를라 브루니보다 더했다. 신혼여행이 악천후 때문에 연기됐다는 사소한 소식이 국내 신문에 보도될 정도였으니 그 명성을 짐작할 만하다.

 오나시스는 재클린 외에도 ‘세기의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와 염문을 뿌리는 등 여성편력이 대단했던 인물이다. 길이 100m에 달하는 초호화 요트 ‘크리스티나’에서 열린 선상파티에 초대받지 못하면 명사 반열에 명함을 내밀기 힘들었다.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를 비롯한 세계 각국의 정치가·왕족·각계 명사들과 폭넓게 교류하며 국제 사교계를 휘저었다.

그의 브랜드는 ‘선박 왕국’이다. 어릴 때 아르헨티나로 이주한 그는 빈손으로 부(富)를 일궜다. 담배수입상으로 돈을 모은 뒤 25살 때 6척의 중고 화물선을 사들여 해운업에 발을 내디뎠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해운업 호황을 타고 유조선·화물선 등 모두 100척의 선단을 이끄는 선박왕 신화를 구축했다. 한때 그리스의 올림픽항공, 미국 맨해튼의 올림픽 타워 빌딩 등도 거느렸다. 75년 사망 당시 선박회사 지분과 그림 등 130억 달러 상당을 유산으로 남겼다고 한다.

 ‘한국판 오나시스’가 깜짝 등장했다. 국세청이 시도상선 권혁(61) 회장에게 탈세 혐의로 4101억원을 추징했고, 검찰도 수사에 나섰다. 그는 국내 최대 선사인 한진해운보다 많은 175척의 화물선·유조선 등을 보유했지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이다. 조세피난처를 통해 세금을 회피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본인은 한국에 거주하지 않아 세금을 낼 이유가 없다고 반박한다. 가혹한 세금은 호랑이보다 무섭다고 했다. 세금은 조금이라도 덜 내려는 게 인간 본성이다. 그래도 우리 국민인데 납세 의무를 다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사상 최대의 ‘세도(稅盜)’로 몰리기보다 한국의 오나시스로 남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고대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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