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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동의 집념 … 국세청 역외탈세와 싸움 진두지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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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이현동 국세청장이 돈을 해외로 빼돌리는 역외탈세 문제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2009년 국세청 차장 시절이다. 당시는 금융위기에서 막 벗어난 선진국들이 거액의 해외 은닉 소득을 찾아 나서고 있을 때다. 금융위기로 나라 살림이 어려워지자 짜낸 대안이었다. 조세피난처에 대한 선진국들의 전방위적인 압박이 진행됐다. 반면 국내의 일부 기업인과 자산가들은 해외투자나 거래를 마지막 남은 탈세 통로쯤으로 여기고 있었다.

 국세청 조사국장 출신으로 오랜 세무 조사 노하우를 가진 이 청장의 ‘감(感)’이 작동했다. 그는 “여러 나라에 걸쳐 이뤄지는 역외탈세 조사는 그동안 하고 싶어도 정보가 없어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2009년 국세청 차장인 그는 이례적으로 역외탈세추적전담센터장을 자원했다. 지난해 8월 그가 국세청장이 되면서 역외탈세 문제는 탄력을 받았다. 이명박 대통령이 내건 후반기 국정과제인 ‘공정사회’와도 잘 맞아떨어졌다.

 하지만 막상 시작하려니 쉽지 않았다. 도처에 걸림돌이었다. 우선 기존 조직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이 청장은 지난해 가을 관련 예산을 확보하는 데 ‘올인’하다시피 했다. 예산당국과 국회를 찾아가 “법보다 무서운 게 조직”이라며 역외탈세 관련 특수활동비 100억원을 요구했다. 영수증을 첨부할 필요가 없는 특수활동비는 정보 기관 등에 예외적으로 허락되는 예산 항목이다. 2008년 프랑스 국세청이 전직 HSBC은행 직원이 훔쳐 나온 고객 정보를 사들인 것같이 공격적인 정보 활동을 하겠다는 의지였다. ‘정보는 돈’이라는 설득에도 결국 특수활동비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일반 예산 58억원이 배정되면서, 올 초 국세청 역외탈세담당관실이 출범했다. 신설된 이 부서는 11일 발표된 한 해운업자의 사상 최대 규모 역외탈세에 관한 결정적인 정보를 입수했다.

 조직이 갖춰지자 본인이 직접 발로 뛰었다. 올 들어 그는 벌써 다섯 나라를 다녀왔다. 2월엔 홍콩과 인도네시아를, 3월에는 인도·싱가포르·필리핀을 찾았다. 우리 기업들에 대한 세무 협조를 부탁하고, 세정 협력을 논의하는 자리였다는 게 국세청 설명이다.

하지만 다른 목적도 있었다. 홍콩·싱가포르·필리핀 등은 이른바 역외금융센터(off-shore financing center)로 불리는 곳이다. 낮은 세율과 금융거래에 대한 철저한 비밀 보장으로 국내 자산가들의 페이퍼 컴퍼니가 집중된 곳이기도 하다. 이 청장은 이들 국가의 국세청장들을 직접 만나 정보 제공을 부탁했다.

 이 청장뿐 아니다. 국세청 본청과 서울지방 국세청의 국제조사 요원들도 해외 출장에 나섰다. 이들 요원은 올 들어 평균 5∼6차례씩 해외를 다녀왔다. 말레이시아 라부안이나 홍콩·싱가포르 같은 동남아뿐 아니라 비행기를 두세 번 갈아타야 하는 파나마, 케이맨군도 등 카리브해 일대의 조세피난처까지 휘젓고 다녔다. 국세 징수를 담당하는 국세청 직원들의 해외 출장 조사는 흔한 일은 아니다. 자칫 상대국을 자극할 수 있는 예민한 사안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이 청장의 강력한 의지 때문이다.

 국세청은 이달부터 아예 홍콩·런던·스위스·미국 등에 15명의 요원을 외국 현지에 단계적으로 내보낸다. 아예 현지에 상주하며 역외 탈세를 찾아내기로 했다. 스위스와의 조세조약 개정안도 국회의 비준 동의를 기다리고 있다. 이 청장은 “올 하반기 조약이 시행된다 해도 스위스에 구체적인 계좌를 지목해야 자료를 받을 수 있다. 국세청의 정보 역량이 더 강화돼야 한다”고 말한다.

6월부터 시행되는 10억원 이상 해외금융계좌신고제도에 대해서도 그는 “역외 탈세 적발의 단초가 될 수 있다”며 직원들을 독려하고 있다. 역외탈세에 대한 관심이 지나친 게 아니냐고 이 청장에게 직접 물어봤다. 이런 답이 돌아왔다. “국내 탈루 소득은 손이 바뀌면서 언젠가는 노출된다. 결국은 국내 소비와 투자에 투입된다. 하지만 한번 나간 자본은 국내로 돌아오지 않는다. 가장 악질적인 탈세다.”

 국세청이 11일 발표한 올해 1분기 역외 탈세 추징액은 41건, 4741억원에 달한다. 올해 목표였던 1조원의 절반가량을 거둬들이는 성과를 올렸다.

윤창희 기자

◆역외탈세 =국내 거주자라면 외국에서 발생한 소득(역외소득)도 국내에서 세금을 내야 한다. 그러나 외국에서의 소득은 감추기 쉽다는 점을 악용해 세금을 내지 않는 게 역외탈세다. 국내에 감춰진 소득은 소비나 상속·증여 등을 통해 언젠가 노출되지만 해외로 나간 소득은 거의 돌아오지 않아 세무당국 입장에선 ‘가장 악질적인 탈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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