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학사관’ 이제 그만 … 국사 교과서 6종 중 4종, 이승만의 독립운동 무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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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 필수’ 오늘 첫 공청회

‘한국사, 필수과목으로 하자’는 중앙일보 신년 어젠다에 대한 공감대가 확산되어 가는 가운데 ‘국사 필수’ 주제의 공청회가 처음으로 개최된다. ‘역사교육과정개발 추진위원회’(위원장 이배용, 이하 역사추진위) 주최로 오늘 오후 2시 경기도 과천시 국사편찬위원회 대강당에서 열린다. 역사추진위는 ‘국사 필수’의 방식과 내용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기 위해 지난 2월 정부 공식 기구로 발족됐다.

 이날 공청회에서는 ‘국사 필수’를 위한 다양한 제안이 발제된다. 사회과목군에 포함돼 있는 역사를 독립과목으로 만들자, 수능에 국사를 필수로 하자, 고위 공직자 시험에 국사를 필수로 하자는 제안 등이다.

 이와 함께 ‘교과서 내용’ 문제도 함께 다뤄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국사를 1~2시간 더 가르치고, 덜 가르치고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대한민국 60여 년의 빛과 그림자를 치우치지 않게 짚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배용 위원장은 “15일과 21일 국사 교과서 내용을 주제로 역사추진위 내부 토론을 벌일 예정”이라고 했다. 국사 교과서 검정을 맡은 국사편찬위원회의 이태진 위원장은 “교과서의 새로운 기준을 만드는 준비를 국사편찬위 내부에서도 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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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국-분단-전쟁 서술이 쟁점=2008년 금성출판사의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의 이념 편향 논란이 일며 법정 소송까지 간 일이 있다. 교과부는 2009년 역사 교과서 새 집필 기준을 마련했다며 “편향적 시각을 배제하고 우리 정통성을 강조하는 내용이 담겼다”고 발표했었다. 그런 과정을 거쳐 나온 올해의 교과서 6종도 문제가 적지 않다는 것이 논란의 골자다. 우리 스스로를 비하하는 ‘자학사관’이 여전히 발견된다는 것이다.

 6종 교과서의 근·현대사 주요 인물 사진을 분석한 결과, 백범 김구 선생이 28회로 가장 많다. 북한의 김일성(12회)·김정일(11회) 부자도 김대중(12회)·박정희(10회) 전 대통령과 비슷한 비중으로 실렸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잘한 일보다 잘못한 게 더 많다고 보는 듯하다. 2종만이 독립협회 활동, 1930년대 이후 독립 운동 등을 비교적 폭넓게 소개했고 나머지 4종은 간략히 서술하는 데 그쳤다. 단독 정부 수립 과정이나 책임도 분명하지 않다. “남쪽에 정부를 수립하자”는 이승만의 ‘정읍 발언’(1946년 6월)은 모든 교과서에 실렸으나, 이보다 4개월 앞선 1946년 2월 북한이 사실상의 단독 정부인 인민위원회를 세운 일의 선후 관계를 명확히 하지 않았다. 90년대 중반 이후 소련과 중국의 현대사 문서가 공개되며 새롭게 밝혀진 내용이 보강되지 않은 것이다. 경희대 허동현 학부대학장은 “이승만 대통령이 독재의 과(過)를 범했지만 국민국가를 세우며 자유민주주의와 세장경제를 택한 큰 공(功)도 있다”며 “(현재 교과서는) 이 둘을 균형 있게 다루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산업화와 민주화의 빛과 그림자=60년대 이후 민주화에 기여한 인물로 전태일·박종철·이한열 열사 등이 3~6곳의 교과서에 실렸다. 서독 파견 간호사나 광부도 ‘산업 역군’으로 6종 교과서 모두 소개했다. 과학자나 6·25전쟁 영웅 백선엽 장군을 소개한 교과서는 없다. 이병철 삼성 회장이나 정주영 현대 회장 등 한국을 대표하는 창업주를 소개한 교과서는 한곳(삼화)뿐이다.

 파블로 피카소(1881~1973)가 그린 ‘한국에서의 학살’이 교과서 2종(천재교육, 미래엔컬처그룹)에 실렸다. 6·25전쟁 때 프랑스 공산당이 미국을 비난하기 위해 당시 프랑스 공산당원이던 피카소에게 의뢰해 그려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해 교과서 검정 과정에서 이 그림이 논란이 됐다. 12명 검정위원의 표결 결과, 그림을 싣자는 쪽이 7 대 5로 우세했다. KAL기 폭파 사건(87년)을 다룬 교과서는 없다. 한국 승객 93명 등 115명이 희생된 이 사건은 2006년 국정원 과거사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가 “북한이 지시한 사건”이라고 발표했다.

배영대·박수련·심서현 기자

정옥자 “근대 이전은 식민사관, 근현대는 이념 편향 여전”
이달 중 국사 바로잡기 가이드라인

정옥자 전 국편위원장

역사추진위는 이달 안에 역사교육 강화 방안 가이드라인을 교육과학기술부와 국사편찬위원회(국편)에 제시할 예정이다. 추진위는 이 보고서에서 ‘고교 한국사 필수화’를 포함해 초·중·고 전 과정에서 역사교육의 틀을 강화하는 내용을 담을 예정이다.

 역사추진위의 제안은 국편이 개발 중인 초·중·고 역사 교육과정 시안에 반영되고 이는 최종적으로 올 8월 이주호 교과부 장관이 고시할 새 역사 교육과정의 근간이 될 것으로 보인다. 올 8월 말까지는 역사 교육의 ‘형식’이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사를 둘러싼 논쟁은 이제부터 더욱 뜨거워질 것으로 보인다. 역사교육의 속을 채울 내용에 대해서는 첨예한 이념 대립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역사 교과서 논쟁의 불씨는 교육과정이 아니라 역사적 사건·인물에 대한 교과서 서술방식에 있었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역사 교과서 집필기준과 검정기준을 잘 만드는 게 핵심 과제”라고 지적한다. 정옥자 서울대 명예교수(전 국사편찬위원장)는 “교과서에서 근대 이전 부분은 여전히 식민사관이 지배적이고 근·현대는 이념편향에 치우쳐 있다”며 “집필·검정기준을 정밀하게 만들어 이번에는 이런 문제를 걸러내야 한다”고 말했다. 이주호 장관도 지난 1월 국편을 방문해 “우리 역사에 자긍심을 키워줄 수 있는 교과서를 많이 만들어 달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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