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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스티브 잡스’냐, ‘제리 양’이냐 IT 천재를 바라보는 월가의 엇갈린 시각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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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호 22면

20년간 함께하자는 약속을 지키기엔 천재 창업주의 꿈이 너무 컸다. 10년의 ‘수렴청정’을 받은 것만으로도 그는 충분하다고 생각한 듯하다. 지난 4일(현지시간) 전문경영인 에릭 슈밋(Eric Schmidt·55)에 이어 구글을 진두지휘할 최고경영자(CEO) 자리에 오른 래리 페이지(Larry Page·38)를 두고 하는 말이다.

10년 만에 CEO 다시 맡은 구글 공동 창업주 래리 페이지

세계 최대 인터넷 기업 구글이 본격적으로 ‘페이지 시대(The Page Era)’를 맞게 됐다. 페이지는 1998년 세르게이 브린(Sergey Brin·37)과 구글을 공동 창업한 후 벤처투자자의 요구로 슈밋을 영입하기 전까지 3년간 CEO를 맡은 적이 있다. 이후 페이지는 제품담당 사장으로 미래사업을 총괄하며, CEO 슈밋, 기술담당 사장 브린과 더불어 구글 의사결정의 최고점인 삼두체제를 구축해왔다.

페이지가 귀환한 이유는 명확해 보인다. 구글이 처한 치열한 비즈니스 환경에서 선두를 놓치지 않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로이터 통신은 “새로운 모바일 기기들이 인터넷 환경을 바꿔놓고 있고, 페이스북·그루폰 등의 소셜네트워크 및 소셜커머스 기업이 빠르게 구글의 주수입원인 온라인 광고사업을 위협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방대해진 조직이 관료화되면서 최근 수년간 많은 직원이 트위터와 페이스북으로 옮기는 ‘인재 유출’의 수모를 겪었다. 그들이 떠나면서 남긴 “창업 초기의 따뜻함과 창의성을 잃어버렸다”는 차가운 작별인사가 페이지에게는 무엇보다 뼈아프게 느껴졌을 법하다.

지난해에는 인터넷 검열 논란 속에 5년 만에 중국 검색시장에서 철수했다. 중국에서의 높은 실적을 기대하던 주주들은 불만스러워했다. 이 과정에서 ‘사악해지지 말라(Don’t be evil)’는 구글 모토를 지키자며 철수를 요구한 브린과 실익론을 내세워 사업 지속을 주장한 슈밋의 충돌이 삼두체제의 균열을 가져왔다는 분석도 있다.

페이지가 겹겹이 쌓인 악재를 뚫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전망이 엇갈린다. 미국의 정보기술(IT) 칼럼니스트 스티븐 레비는 와이어드에 기고한 글에서 “페이지는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처럼 각인될 잠재력과 개성을 갖고 있다. 페이지만큼 구글의 야망이나 가치, 세계관을 잘 아는 사람은 없다. 반면 그가 거만하고 비밀스러운 면이 있는 괴짜라는 점을 감안하면 구글의 앞날을 예측하기는 더 힘들어졌다”고 평가했다.

시장에서는 일단 부정적 여론이 우세한 것으로 보인다. 나스닥시장에서 구글 주가는 올 1월 20일 페이지가 새 CEO가 될 거라는 발표가 나온 후부터 이달 7일까지 7.5% 하락했다. 이 기간 나스닥지수는 3.4% 올랐다.

페이지를 못 미더워하는 쪽은 10년간 공식업무를 슈밋에게 맡긴 채 자기가 하고 싶은 일만 해왔다고 지적한다. 구글의 첫 번째 직원이었던 크레이그 실버스타인은 AP통신에 “페이지는 성격상 CEO가 되기에는 맞지 않는 몇 가지가 있다. 예를 들어 CEO가 수많은 모자를 써봐야 하는 자리라고 치자. 이 경우 페이지는 어떤 모자에는 엄청난 흥미를 보이겠지만 다른 것들에는 아예 관심을 안 둘 것”이라고 말했다.

구글은 2004년 상장 당시 애널리스트들에게 예상 실적을 제공하지 않겠다고 선언해 처음부터 월가와 좋은 관계를 맺지 못했다. 페이지가 단기 실적에는 별 관심이 없고,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기로 한 대체에너지 사업과 무인로봇자동차 개발 등 ‘몽상(Pipe dream)’에 가까운 장기계획에 치중한다고 비판하는 이들도 있다. 구글의 전 엔지니어 폴 부크하이트는 로이터와의 인터뷰에서 “페이지에게 영업은 우선순위가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페이지에 대한 기대감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 구글이 페이지의 머리에서 탄생됐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페이지의 몽상이 없었다면 현재의 구글도 없었고, 앞으로도 그의 아이디어가 구글의 중심이 될 것이라는 논리다. 구글 신화를 이룩하는 데 핵심 기술 역할을 한 ‘페이지랭크(PageRank)’는 바로 페이지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페이지가 10년간 슈밋으로부터 도제식 경영수업을 받으면서 CEO가 될 준비를 착실히 해왔다는 주장도 있다. 구글의 전 기술담당 부사장 출신의 더글러스 머릴은 AP에 이렇게 전했다. “페이지는 이제 성숙했다. 회사의 프로젝트들이 어떻게 처리되는지를 꿰고 있고, 적재적소의 실행 방안과 예측 가능한 유행이 무엇인지도 배웠다.”

미시간대를 졸업한 페이지의 인생은 95년 실리콘밸리의 산실인 스탠퍼드 대학원에 입학해 세르게이 브린을 만나면서 꽃을 피웠다. 내성적인 독불장군 스타일의 페이지와 외향적이고 사교적인 브린은 절묘하게 맞아들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구글의 전신인 백럽(Backrub)을 탄생시켰다.
페이지와 브린은 거의 비슷한 지분을 보유하고 있지만, 페이지가 주도하고 브린이 받쳐주는 관계다. 첫 CEO가 페이지였던 것은 물론 상장 후 워런 버핏을 본떠 주주들에게 해마다 보내는 ‘창립자의 편지’는 항상 페이지의 몫이었다. 실버스타인은 레비와의 인터뷰에서 “둘 다 과학기술에 능하고 상상력이 있지만 비전을 이끄는 쪽은 페이지다. 그는 기회가 있으면 강하게 추진하고 항상 일을 크게 만든다”고 말했다.

10년간 슈밋의 뒤에 있었지만 페이지는 구글의 핵심 사업을 추진하며 미래를 설계했다. 그는 2002년부터 모교인 미시간대의 장서를 기반으로 전자책 서비스를 추진했다. 2004년에는 지메일 무료서비스를 실시했다. 2005년 모바일 운영체제(OS) 기업 안드로이드, 2006년 무료동영상사이트 유튜브를 각각 인수해 해당 분야의 점유율 1위로 키워냈다.

지난 1월 페이지의 복귀 발표 직후 구글은 올해 연간 규모로 사상 최대인 6200명의 직원을 채용할 것이라고 밝혔다. 시장에서는 페이지가 본인의 시대를 맞아 인재 확충을 통해 도약을 이루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으로 해석한다.

로이터는 “월가의 투자자와 애널리스트들은 페이지가 구글의 최대 강점인 검색사업과 모바일사업을 굳건히 하는 동시에 구글의 지위를 위협한 소셜네트워크서비스 시장에 공격적으로 진입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고 전했다.

월가는 페이지가 애플 신화를 이룩한 ‘제2의 스티브 잡스’가 될 것이냐, 복귀 후 야후 주가가 50% 이상 하락한 걸 지켜봐야만 했던 야후 공동창업자 제리 양처럼 될 것이냐의 기로에 서 있다고 평가한다.

페이지에 우호적인 투자자들은 관료화된 구글 조직에 혁신을 불어넣어 현재 약 1900억 달러인 시가총액을 훨씬 더 끌어올릴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대규모 채용에 따른 비용 증가로 주당순이익이 하락하는 것부터 걱정해야 할 것”(BGC파이낸셜 애널리스트 콜린 길리스)과 같은 회의적인 시각도 있다.

블룸버그는 페이지가 올해 초 한 인터뷰에서 “우리는 회사 규모가 커질 때마다 우리의 변화 속도와 열정을 유지하면서 전진하길 원한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당장 14일 구글의 올해 1분기 실적 발표는 CEO로서 페이지가 오르는 첫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공식석상에 나서길 꺼렸던 페이지가 콘퍼런스 콜(Conference Call·상장기업이 기관투자가와 애널리스트 등을 대상으로 하는 전화회의)을 주재할지, 나오지 않는다면 어떤 새로운 방식으로 자신의 비전을 전달할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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