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Novel] 이문열 연재소설 ‘리투아니아 여인’ 6-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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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백두리 baekduri@naver.com

거기다가 그 해외공연에서 받은 호평에 힘입어 혜련이 이끄는 시립교향악단이 보다 유서 깊은 음악무대로부터 초청받게 되면서 매스컴의 갈채와 찬사는 더욱 요란해졌다. 그리고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그 음악 홀에서의 협연마저 현지의 호평 속에 막을 내리자 혜련은 그 시대 대중문화의 아이콘 중 하나로 끌어올려졌다. 이제는 한 뛰어난 지휘자로서의 음악적 재능이나 자질뿐만 아니라 그녀의 지도력이나 카리스마까지 들먹여지고, 우상화라 해도 좋을 만큼의 신드롬으로 번져 그녀를 시대의 명사로 만들었다. 그 모두가 혜련이 내 아파트를 다녀간 뒤로 여섯 달 안에 벌어진 일이었다.

 갑자기 자신에게 닥쳐온 그와 같은 변화를 대중과 함께 스스로 즐겼는지, 아니면 얼결에 올라타게 된 집단히스테리에 압도되어 함께 휩쓸려 가느라 그랬는지 모르지만, 그동안 혜련은 한 번도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어쩌다 만나게 되어도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거나 건성으로 근황을 묻는 정도로 헤어질 뿐, 오랜만에 만난 감회조차 사사로이 나눌 틈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그날 밤 아파트에서 있었던 일은 아이 시절의 개꿈처럼 갈수록 기억이 자신 없어지는 우발사로 자리 잡아 갔다. 나는 희미해진 상간의 기억을 가진 근친처럼 오히려 혈육의 정 같은 것에 더 이끌리어 그녀에게 닥쳐올 환란을 불안하게 예감할 뿐이었다.

 그때는 우리 문화계도 30년 만의 정권교체를 앞뒤로 한 한국형 홍위병의 난동을 한 차례 경험한 뒤였다. 정파와 지역성에 바탕한 논리로 무장하고 이제 막 열린 인터넷 광장을 선점한 그들은 그 새로운 형태의 대자보로 무자비한 한국판 문화혁명을 진행시키고 있었다. 중국 문화혁명에서 ‘반동학술권위’ 또는 ‘반동문화권위’에서 따온 것임에 분명한 문화권력이란 말이 무슨 전능한 칼처럼 휘둘러지며 기존의 중심과 권위를 난도질했다.

 이를테면 문학에서는 중국의 홍위병들이 이미 1920년대에 ‘낙타상자’로 뉴욕에서 베스트셀러를 냈던 랴오서(老四)를 목매달고 중국 문단의 원로인 육순의 바진(巴金)을 하방(下放)하여 10년이나 외양간에 가두었듯, 한국의 홍위병들도 자기들이 지지하는 정파나 지도자를 따라주지 않는 작가를 문화권력이란 이름으로 몰아대더니 급기야는 그 집 앞에 몰려가 서점에서 아직 팔리고 있는 그의 책 장례식을 치렀다. 또 백일 뒤에는 그 작가가 쓴 책의 상징물을 불태우고, 이른바 풍장(風葬)으로 새들에게 뜯기게 한다며 다시 그의 책들을 나무에 매달았다. 여기저기서 끌어모은 그의 책들을 포로처럼 흙 마당에 끌어다 놓고 마소에게 밟힌 뒤에 처참하게 짓밟힌 그 사진을 인터넷에 올리기도 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다른 분야의 사정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중국의 홍위병들이 주변에서 조금이라도 누린 혐의가 있으면 스승이건 부모건 가리지 않고 목줄을 매고 팻말을 달아 거리로 끌어내어 사형(私刑)을 가했듯, 한국의 홍위병들도 어느 분야건 권위나 인기를 누린 이면 모두 문화권력의 팻말을 달아 매도하고 표독스러운 언어로 사형을 가했다. 나는 그 무렵 한국의 홍위병들에게 지침서 노릇을 했던 어떤 월간지에 열두 사람의 문화권력 명단이 실려 있는 걸 본 적이 있다. 앞서 말한 그 작가며, 가장 발행부수가 많은 일간지의 영향력 큰 논설위원, 한창 인기 있던 음악 지휘자, 가장 그림 값이 높은 화가에다,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던 여배우 등의 이름이 얹혀 있었던 게 지금도 기억난다. 특히 그때 겨우 이십 대 후반이던 그 예쁜 영화배우는 그로부터 십 년 뒤에 가엾게도 자살했는데, 직접적인 이유는 조금 달라졌지만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악의는 틀림없이 그때의 그것에서 진화된 것이었다.

 내가 혜련을 위해 두려워한 것은 바로 그런 분별없는 다중의 호오(好惡)와 종잡을 수 없는 그 변덕이었다. 그들의 대중적 성감대와 맞아떨어질 때에는 눈부신 아이콘으로 추어올려 그 갈채와 박수에 정신을 못 차리게 만들다가 어느 순간 주파수가 바뀌고 교신이 끝나면서 예고도 없이 추어올리던 손길을 거두어 버린다. 그리고 패대기쳐지듯 바닥에 떨어지면 호의에서 깨어나 더 표독스러워진 악의로 그 추락한 아이콘을 짓밟아 버린다. 나는 그런 대중의 속성, 특히 인터넷 시대의 소통 과정에서 더욱 증폭되고 제어하기 어려워진 집단 악의에 소름 끼쳐 했다. 그리고 그때에는 이십여 년 전 부산에서 동네 아이들에게 따돌림당하던 혜련의 모습이 겹쳐져 공연히 가슴 서늘해졌다. 그럼 너는 또 이 땅을 떠나게 될 테지….

 그러던 어느 날 혜련이 내 소리 없는 부름에 대답이나 하듯 불쑥 전화를 걸어왔다. 아직 초저녁인데 전화기 속에서 자동차 경적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길가에서 하는 전화 같았다. 그날따라 무언가 정리해야 할 게 있어 일찍 아파트에 돌아와 막 컴퓨터를 켜고 있는데, 혜련이 전화를 걸어 불쑥 물었다.

 “전데요. 지금 어디 계세요?”

 마치 한 집에 있다가 아침에 헤어진 사람처럼 당연한 목소리라 내가 오히려 의아해 하며 받았다.

 “응, 일이 있어 일찍 집에 돌아왔다. 그런데 아닌 밤에 홍두깨라더니 너야말로 웬일이냐?”

 “여의도예요. 방송국 앞. 갑자기 휴가를 받은 기분이 들어 한번 전화드렸어요.”

 “휴가 받은 것 같다니 한가한 모양이로구나. 왜 우리 집에라도 오고 싶으냐?”

 “그럴 여유는 없고요. 아직 모임 하나 더 남았어요.”

 “그럼 왜 휴가를 받은 기분이냐?”

 “그냥…. 주차장에서 차를 찾다가 비어 있는 벤치를 보고 앉고 나니.”

 “잠시 빈 벤치에 앉는 게 휴가 받은 기분이라니, 너 정말로 몹시 바쁘구나.”

 “하긴 듣고 보니 그렇네요. 실은 휴가 받은 기분이 아니라 휴가를 받고 싶은 기분이었는지도 모르지요.”

 그제야 하고 싶은 말을 끌어낼 틈을 찾아낸 기분으로 내가 가볍게 물었다.

 “바쁜 건 알겠다만, 너 현기증 나지 않아?”

 “현기증요? 그건 또 왜요?”

 “그렇게 여럿이서 그렇게 열심히 추어대는데 현기증이 나지 않아?”

 “아직 그건 잘 모르겠는데요.”

 “조심해라. 나는 아직 경험해 보지 못했다만 참으로 고약한 시대 같다. 몰려와 헹가래 치는 것도 눈 깜작 할 사이지만, 솟아오른 사람 받쳐주지도 않고 돌아서는 것 또한 이 시대 대중이다. 여럿이서 높이 헹가래 쳐 올릴 때가 더욱 위험하지. 그래 놓고 아무도 받아주지 않으면 패대기쳐진 것보다 더 심하게 다치게 되지. 게다가 조금 전에 헹가래 쳐준 사람들 중에는 받아주지 않을 뿐 아니라 그래서 패대기쳐진 사람을 오히려 밟아버리는 사람도 있지. 높이 떠 있을 때 조심해라. 언제나 착지할 곳을 살펴두고 떠 있으란 말이다. 사람 높이 띄워놓고 제때 받아주지 않아 병신 되는 사람 여럿 봤다.”

 “무슨 말씀 하시는지 알 듯하네요. 하지만 아주 실감나는 충고는 아니고요. 나는 지금 현기증이 아니라 피로한가 봐요. 사람들의 호의를 피곤하게 여기는 게 지극히 미안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런 그녀의 말에 실린 애잔한 여운에 갑자기 가슴이 저려와 준비 않은 말을 불쑥 내뱉게 만들었다.

 “피곤하다면 모임 뒤에 이리로 와. 내가 이해하는 그런 피곤이라면 여기 와서 쉬어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러자 그녀가 가볍게 웃었다.

 “거기서 쉬어요? 잘될 것 같잖은데. 그냥 근친상간의 기억이나 더 쌓아가게 되는 거 아닐까요?”

 그러는 억양으로 미루어 벤치에서 일어나며 하는 소리 같았다. 내가 갑자기 후끈 달아오르는 기분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것도 꼭 안 될 것은 없지. 내가 쉴 수 있다면. 지금 높이 떠 있는 네가 다치지 않고 땅에 내려설 수 있는 방도가 된다면.”

 “됐네요. 근친님. 아니, 큰오라버니. 나도 이제 알 만큼은 알아요. 괜찮아, 괜찮아, 하며 허세를 부리시다가 내가 그 아파트를 떠나자마자 꼭 옛날 코미디에 나오는 장면처럼 몸을 비비 꼬며 울려고요? 이러면 안 되는데, 내가 또 누이와 상간했어, 내가 죽일 놈이야, 그러시면서.”

 “그건 무슨 소리야? 내가 언제 그랬어?”

 내가 진심으로 불만을 드러내며 항의했으나 그녀는 받아들여주지 않았다.

 “반년을 넘고 보니 그게 불의의 사고였다는 게 더 뚜렷해지네요. 게다가 저 아직 견딜 만해요. 피로하기는 해도 즐거운 구석도 많고요. 대중의 갈채 너무 그리 무시하지 마세요. 아, 저기 제 차가 있네요. 그 아파트에는 다음 일요일 오후쯤에 한번 들를게요. 오랜만에 저녁이나 맛있게 지어 먹어요. 그럼 전화 끊어요.”

 하지만 그 다음 주일에도 그녀는 내 아파트를 찾아오지 않았다.

 그로부터 한동안 그녀는 그래도 여전히 훌륭한 음악가였고, 카리스마가 있는 리더십의 주인공이었으며, 누구 못지않은 지명도를 가진 우리 시대의 명사였다. 그리고 활동영역도 더욱 늘어나 어떤 때는 매스컴과 광고판에서 그녀를 만나는 것만도 하루에 열 번이 넘을 때도 있었다. 그 바람에 다시 몇 달이나 그녀와 마주해 본 적이 없으면서도 그 무렵 나는 늘 그녀와 함께한 것 같은 유사기억까지 가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그해 연말이 다가오는 어느 날 내가 불안하게 여기던 날이 마침내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냈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이 단초는 아주 사소한 일에서 비롯되었다.

이문열 소설가
일러스트=백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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