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연극 ‘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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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외환딜러 신우 역을 연기한 배우 김동완은 몸을 사리지 않는 연기로 큰 박수를 받았다.


이 연극, 막판에 확 깬다. 남자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로 소파에 꽤 오랜 시간 앉아 있다. 에로틱하지 않냐고? 전혀 아니다. 뱃살이 축 늘어진 남자는 두 다리를 쩍 벌린 채 뭔가를 어기적거리며 TV를 본다. 이 배우는 이 역을 실감나게 표현하기 위해 3개월간 밤마다 라면을 먹으며 몸무게를 10㎏이상 늘렸다고 한다. 배우의 의도대로 관객은 민망할 뿐이다.

 서울 남산예술센터에서 공연 중인 연극 ‘살’(이해성 작, 안경모 연출)은 불편한 작품이다. 중년 남성의, 전혀 매력적이지 않은 몸뚱어리가 고스란히 보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가 숨기고픈 현대 사회의 속살이 적나라하고 거침없이 까발려진다. 연출의도를 빌리면 “실물경제를 대체한 금융 자본주의를 고발”하며 “승자독식의 냉혹한 생존게임이 만연한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작품이다. 하지만 그런 거창한 말 없이 그냥 봐도, 썩 재미있다.

 작품 속 신우라는 인물은 잘 나가는 외환 딜러다. 하루에 수십 억원은 손쉽게 벌어들인다. 대신 불규칙한 식습관과 운동 부족으로 고도 비만에 시달린다. 그런 와중에 어머니가 간암 말기 통보를 받는다. 간이식 수술 외엔 딴 방법이 없다. 하지만 신우에게 고액 연봉을 제시하며 스카우트하려는 헤지펀드 회사는 그의 건강한 몸을 절대적으로 요구한다. 신우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연극은 빠르다. 잦은 무대 전환으로 템포감을 유지했고, 현란한 영상으로 입체감을 선사했다. 휑한 무대를 채우면서도 주인공의 내면을 상징화하는 코러스들의 군무 역시 눈길을 끌었다.

 무엇보다 폼을 잡지 않는다. 작품은 프로메테우스 신화를 모태로 삼고 있다. 현대문명과 자본이 프로메테우스의 불처럼 인간에게 축복을 주고 있지만, 반대로 인간의 본성을 훼손시켜 더 큰 고통을 안겨준다는 메시지를 밑에 깔고 있다.

 대개 그리스 신화가 작품에 한번 등장하면, 본래 이야기는 어디론가 사라진 채 신화에만 매몰되는 게 기존 국내 연극의 풍경이었다. 반면 연극 ‘살’은 관념적 대사의 유혹에 빠지려는 순간마다 절묘하게 치열한 현실로 돌아오는 냉정함을 잃지 않았다. 고수란 무릇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대놓고 하지 않는 법. 주제 의식을 강조하지 않고 꾹꾹 참았다는 점이 연극 ‘살’의 미덕이다.

최민우 기자

▶연극 ‘살’=17일까지.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 2만5000원. 02-758-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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