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그룹 쌓아둔 돈 316조 … 곳간 두둑한 곳 주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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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2면

자본금에 비해 가장 많은 돈을 쌓아놓고 있는 기업은 태광산업. 지난해 말 기준으로 자본금 364배의 돈을 보유하고 있다.


대기업 곳간에 돈이 가득하다. 지난해 사상 최대 실적을 내며 벌어들인 돈이 많은데, 불확실한 경기 상황 등을 이유로 투자를 주저해 돈을 쌓아놓은 것이다.

 5일 한국거래소와 한국상장사협의회에 따르면 자산총액 기준 10대 그룹 상장 계열사가 지난해 말 투자하지 않고 쌓아 놓은 돈(유보금)은 316조4000여억원이다. 유보율만 1219.45%로 자본금(25조9493억원)의 12배가 넘는다. 한 해 전인 2009년(1122.91%)보다 96.54%포인트 높아졌다. 유보율이 가장 높은 곳은 태광산업(3만6385.49%)이었다. SK텔레콤(2만9102.71%)과 롯데제과(2만2741.73%)가 뒤를 이었다. 유가증권시장에 상장된 12월 결산 10대 그룹 계열사 중 전년과 비교 가능한 72개사가 분석 대상이다. 전체 상장사(626곳)를 따져봐도 유보율은 746.38%로 외국 기업에 비해 크게 높은 편이다. 유보율이 높다는 것은 투자나 연구개발 등에 쓸 수 있는 ‘실탄’이 풍부하다는 의미다. 재무구조가 탄탄하다는 뜻도 된다. 유보금은 자사주 매입이나 현금 배당의 재원으로도 쓰인다.

 넉넉히 쌓여 있는 돈은 기업과 주가에는 일단 긍정적이다. 투자자로서는 유상증자에 따른 주가 하락 위험이 줄어드는 장점이 있다. 자사주 매입 등이 늘어나면서 주가에는 호재로 작용할 수도 있다. 금융위기와 같은 어려운 시기를 견디는 데는 무엇보다 든든한 힘이 됐다.



 경기가 회복될 때도 마찬가지다. 설비와 연구개발(R&D)에 투자할 재원이 풍부한 만큼 시장의 주도권을 잡는 데 유리하다. 대표적인 예가 반도체 업종이다. 국내와 일본·대만의 반도체 기업의 유보율 차이가 경쟁력 차이로 이어진 것이다. 동양종합금융증권에 따르면 삼성전자의 유보율은 1만%에 육박하지만 일본 엘피다(57%)와 대만의 프로모스(-46%)는 이와 비교하면 과락 수준이다. 풍부한 실탄을 바탕으로 ‘설비와 R&D 투자→공정 전환→원가 절감→이익 확대→유보금 증가’의 선순환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동양종합금융증권 이도한 연구원은 “지난해 6월 이후 국내 반도체 기업과 일본·대만 기업의 주가 차별화가 본격화된 데는 향후 설비투자 능력과 이에 따른 원가경쟁력에 주요한 이유가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돈만 쌓여 있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경기 회복이 본격화하는 상황에서는 성장 기회를 잡고 ‘새로운 먹을거리’를 찾아나서야 한다. 그래야만 반도체 업종과 같은 선순환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신영증권 김세중 투자전략팀장은 “유보율이 높은 것이 결정적인 단점은 아니지만 새로운 성장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적극적인 투자에 나서지 않는다면 ‘자산주’로 머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생산적인 투자로 돈이 흘러가지 않고 고여 있어서는 안 된다는 설명이다.

 그런 만큼 유보율이 높은 기업 중에서도 ‘성장 우량형’으로의 체질 개선을 모색하는 기업이라야 전망이 밝다. 김세중 팀장은 “돈만 끌어안고 있는 기업은 주가 상승기에 뒤처져 있다가 다른 기업이 다 오르면 뒤늦게 겨우 따라잡기 식으로 주가가 오른다”며 “투자를 통해 과실을 늘려가지 않으면 주가는 명확하게 갈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하현옥 기자

◆유보율=기업의 잉여금(이익잉여금과 자본잉여금)을 납입 자본금으로 나눈 것이다. 외부에서 가져온 돈을 빼고 기업이 얼마나 많은 돈을 보유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국내 대기업이 이처럼 곳간에 돈을 쟁이기 시작한 것은 외환위기 이후부터다. 정부가 부채비율을 낮출 것을 주문하고 외국인 주주의 고배당 요구가 이어지면서다. 10대 그룹의 유보율은 2004년 말 600%대를 넘어 2007년 700%대로 올라섰다.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꾸준히 늘어나 2009년에 1000%를 돌파했다. 기업들이 보수적 경영을 하면서 돈 쌓기에 주력했기 때문이다. 불확실성을 이유로 투자와 고용을 늘리지 않았던 것이다. 국내 기업이 세계 시장 점유율을 높이면서 실적이 좋아진 것도 유보율 상승을 부추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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