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 하게 만드는 문화정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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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네티즌 독자 여러분께 사과드린다. 필자의 개인적인 사정으로 2주 넘게 찾아 뵙지 못했다. 그점, 지면(화상) 으로 대신 진심으로 사과말씀 전한다.

요즘 세상이 얼마나 빨리 변하는지, 2주 사이에도 필자의 기사가 거짓말로 변해버렸다. 정부가 청소년보호연령 기준을 19살로 올리고, 이를 국회 법사위가 통과시키더니 열흘쯤 후에 국회 본회의가 자유투표를 통해 이를 다시 18살로 재조정했다. 성인영화전용관도 허용한다고 했다가 일주일만에 다시 "안된다"고 하는 바람에 오보를 내게 하더니 18살이냐 19살이냐 문제도 필자로 하여금 결국 거짓말을 하게 만들고 말았다.

방송위원회나 영화진흥위원회 건도 마찬가지다. 새로 구성될 방송위원 9명을 누가 어떻게 구성하느냐를 두고 여야가 그렇게 싸우더니, 하루가 멀다하고 기사를 고치게 만들었다. 결국 대통령이 3인, 국회의장이 6인(국회 문화관광위원회 3인 추천 포함)을 임명하는 것으로 결정됐다. 방송위원회가 얼마나 중요한 기구인지 아마도 알만한 사람은 알고 계실 것이다. 미국의 방송위원회격인 FCC(연방통신위원회)가 대통령 직속기구로서 독립된 권한을 행사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영화진흥위원회의 경우는 10명의 위원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사표를 던지는 바람에 매일 기사를 다시 쓰게 했다.지난 5월말 구성 당시에는 김지미씨와 윤일봉씨가 들어오지 않겠다고 버티더니, 이 두사람이 결국 첫위원장이었던 신세길씨를 몰아내고 박종국씨를 새 위원장으로 옹립한 후 의기양양하게 입성하자 이번에는 문성근씨와 정지영감독, 안정숙씨(한겨레 문화부 대기자)가 자리를 던졌고 임권택감독, 채윤경교수(계원조형예술대), 김우광상무(SBS프로덕션)가 차례로 사표를 냈다. 영화진흥위원회가 이런 지경에 이르기까지 문화관광부는 뒷짐지고 수수방관하기만 했다. 하지만, 견디다 못한 필자가 어떤 지면을 통해 문화관광부의 무책임성을 공박하는 기사를 내자마자 박지원장관이 기자회견을 갖고 영진위의 정상화 방안을 발표하는 바람에 부랴부랴 조판과정에서 글을 수정해야만 했다.

"조선말은 끝까지 들어 봐야 한다"는 우스개 얘기처럼, 최근에 있었던 일련의 오보사태는 좀더 진득하게 결과를 기다리지 못한 필자의 책임이 물론 가장 큰 것이긴 하지만 그만큼 대중문화와 관련한 정부정책에 혼선이 많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바라건대, 새천년에는 문화정책에 중심이 섰으면 한다. 한마디로 너무 피곤한 한해였다.

다가오는 새천년에는 문화활동에 대한 규제도 보다 "오픈 마인드"의 입장에서 시행됐으면 한다. 이는 최근 영화 〈거짓말〉의 불법 CD나 비디오가 시중에서 유통되고 있는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영상물등급위원회의 두 차례의 결정, 즉 〈거짓말〉같은 영화는 청소년보호를 위해, 그리고 국민들의 건강한 윤리의식을 해치지 않기 위해 "보여져서는 안된다"는 그 결정이 지금 과연 효과를 거두고 있는 가 묻고 싶다. 오히려 더 음성적으로, 더 어두운 뒷골목으로 사람들을 몰아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필자가 생각컨대 매체 발전과정은 보다 첨단화의 길을 걷고 있고, 또 보다 퍼스널화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국가기관의 정책과 규제는, 굳이 시대로 따지면, 봉건시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마디로 황새와 뱁새의 차이인 것이다. 필자 역시 무정부주의자가 아닌 바에야(부득이 분류해야 한다면 자유주의자정도?) 사회가 작동해 나가는데 필요한 일정한 기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인정하는 바, 다만 그 기준에 대한 합의가 우리의 경우 지나치게 경화돼 있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그 합의를 좀더 연성화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새천년에는 심의문제로 시간을 소모하지 않았으면 한다. 〈거짓말〉은 재미있는 작품은 될지언정 결코 괜찮은 작품이 아니다. 작품성을 가지고 논하면 금방 결판이 날 것을, 표현의 자유 논쟁으로 이를 넘기면 얘기가 복잡해지는 것이다. 반복하거니와 한마디로 너무 피곤한 한해였다.

필자의 전공이 영화인 관계로 이에 대해 한마디만 더. 역시 다른 지면을 통해 몇번 강조한 일이지만 전혀 고쳐지지 않고 있는 일이 있다. 영화와 관련한 텔레비전 프로그램들 문제다. 제발 부탁건대, 개봉도 하지 않은 영화의 줄거리는 공개하지 않았으면 한다. 〈텔 미썸딩〉이 개봉하기도 전에 범인이 심은하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나 〈해피 엔드〉에서 최민식이 전도연을 살해하는 장면 등을 미리 보여주면 도데체 누가!, 그 영화를 보러 가려고 하겠는가? 영화 한편을 약 10분에서 15분으로 끊어 요약본을 보여주는, 그 무책임한 제작 태도때문에 영화인구가 얼마나 줄어 들고 있는지 생각들을 해봤는지. "영화 프로그램"들이 "영화 광고"와 다른 점은, 이른바 저널리즘 정신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른 것이라고 본다. 작품에 대한 주관과 철학이 없는 한 그 방송프로그램 30분이면 30분, 1시간이면 1시간 모두가 광고시간과 다를 게 없다. 차라리 대놓고 광고를 하는 게 낫다.
영화관련 TV 프로그램들때문에 오히려 영화인구가 늘지 않거나 혹은 더 떨어진다면 산업규모가 축소되고 결국 이들 영화프로그램들도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자신의 무덤을 자신 스스로가 파고 있는 셈이다. 좋은 영화관련 프로그램들이 영화인구를 늘리고 산업을 키워 다시 더욱 질높은 프로그램 제작으로 연결되는, 이른바 선순환 구조에 대한 사고를 키워가야 할 때다. 다가오는 새천년에는 이런 일들이 없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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