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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사탕 〈Peppermint Candy〉

중앙일보

입력

한국영화 팬이라면 이제 영화배우 설경구(30)란 이름을 기억해 두는 게 좋을 것 같다.

이제 출연작이 조연역을 포함 6편에 불과하지만 로버트 드니로처럼 연기의 폭이 넓어, 곧 스타덤에 오를 '미래형' 배우라는 영화계의 평가 때문이다.

'바탕이 엷은 멋내기 보다는 연기로 말하는 배우로서 '그의 역량은 최근 출연작인 이창동 감독의 두번째 작품 〈박하사탕〉(이스트필름 제작)에서 한껏 과시되고 있다.

이 작품에서 보여준 광기(狂氣) 넘치는 그의 연기는 앞으로 두고두고 회자되는 명연기로 꼽힐 만하다.

설경구는 〈박하사탕〉에서 오늘의 시점에서 출발, 20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현대사의 아픈 상처와 호흡을 같이하는 '김영호' 란 인물로 열연했다.

꽃을 보며 눈물을 흘리던 79년 여름의 순하디 순한 그 청년이 광주민주항쟁 진압군과 고문경찰, 그리고 IMF의 파산자로서 겪는 추락의 인생사는 우리의 가슴을 울린다.

그런 격한 감정이입의 추동력은 단연 설경구의 연기에서 나오고 있다.

〈박하사탕〉이 지난 13일 부산영화제 개막작으로 상영된 직후 인터뷰에서 그는 "촬영내내 미쳐있었다" 고 했다.

그도 그걸 것이, 만약 제정신이었다면 할 수 없는 감정의 북받힘과 절제라는 이율배반적 요소가 그의 연기에서 묘한 동거를 이루어 냈기 때문이다.

설경구는 지난 93년 한양대 연극영화를 졸업하자마자 동문들이 주축이 된 극단 한양레퍼토리에 동참, 연기인생을 시작한 연극배우 출신. 김민기가 이끄는 극단 학전의 뮤지컬 '지하철 1호선' '모스키토' 등에도 출연, 특유의 성실함과 다변(多變)한 캐릭터를 발휘해 연극계에서는 진작부터 '미완의 대기' 로 꼽혀왔으나 대중적 주목은 받지 못했다.

음지에서 닦은 이같은 6년간의 절차탁마(切磋琢磨)가 도약의 발판이 됐음은 물론이다. 그 잘 벼린 칼을 영화판에서 써야할 때가 왔을 때 그는 탄탄한 연기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 결과 이제는 한석규.박신양.최민식으로 형성된 '동국대파' 남성 트로이카 체제에 복병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연극에서 영화로 활동 영역을 넓힌 뒤 고작 1년만여만에 벌써 주연급 영화를 여러 편 해치우며 뚜렷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데뷔작 〈처녀들의 저녁식사〉(98년)에서는 적당히 재미있으며 부담감 없는 남자를, '송어' (11월 6일 개봉)에서는 현실타협적인 야비한 은행원을 연기했다.

〈유령〉(99년)에서는 군인정신에 투철한 장교였고, 〈허공에 멈추는 새〉(99년)에서는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갈등하는 몽상가이기도 했다.

작품으로 치면 이번 부산영화제는 그의 독무대나 다름없다.

〈박하사탕〉을 비롯, 〈유령〉〈송어〉〈새는 폐곡선을 그린다〉등 무려 4작품이 출품됐고, 인터뷰 스케줄을 잡느랴 영화제 기간 내내 잠시도 쉴틈이 없다고 '즐거운 비명' 이다. 숨 막힐 정도의 빠른 질주다.

그러나 설경구는 이런 식의 '갑작스런' 스포트라이트를 오히려 부담스러워하는 눈치다.

"아직도 제대로 검증된 게 없습니다. 그냥 거품일 뿐이에요. 제 무기는 성실 하나 밖에 없습니다. " 자신을 한없이 낯추며 스타보다는 '배우' 가 되고 싶어하는 설경구의 이런 소박한 소망은 너도나도 스타를 열망하는 풍토에서는 자칫 '이단아' 로 비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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