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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102)

중앙일보

입력

일러스트 ⓒ 김영진, heakwan@ymail.com

돌아눕는 뼈 2

“아니, 어디서 오는 거요?”
백주사가 볼멘소리로 미소보살을 맞았다.
미소보살은 말없이 눈을 들어 백주사와 나를 힐끗 보고 난 뒤 명안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혼이 나간 듯도 하고 무슨 생각에 골똘한 것도 같은 눈빛이었다. 이미 제 어머니에게 뿌리쳐진 것이 섭섭했던지 눈물이 글썽해진 애기보살은 한 발짝 뒤로 물러서 있었다.
“사람이 왜 그 모양이오?”
“…….”
“어디 가 있든 연락은 닿아야지. 이사장이 얼마나 걱정하셨는지 원.”
“…….”

미소보살은 끝내 아무 말도 없이 명안전 쪽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그 사이 몰라볼 만큼 살도 빠져 있었다. 늘 달고 살던 미소도 보이지 않았다. 당신의 남편이었던 사람이 착란을 일으켜 제석궁에서 여러 노인과 장애인을 망치로 때려죽인 사건에 미상불 충격을 크게 받은 게 확실했다. 백주사와 애기보살이 뒤를 따르자 그녀는 가던 길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눈총을 주었다. 따라오지 말라는 눈총이었다.
“알았어요. 이사장님도 기다리고 계실 테니, 가 봬요.”
머쓱해진 백주사가 애기보살의 손을 잡고 제자리에 멈춰 섰다.
미소보살이 역시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명안전으로 이어진 비탈길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해맑은 햇빛이 그녀의 정수리로 쏟아지고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단호한, 그렇지만 동시에 산이라도 이고 가는 듯 무거운 발걸음이라고 나는 느꼈다.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는 예수의 뒷모습이 연상되기도 했다. 무엇인가, 이사장에게 해서는 안 되는 금기의 말을 마침내 내뱉으려고 결심한 눈치였다.

포클레인 소리가 끊임없이 들렸다.
단식원 건물은 비어 있었다. 단식수련은 중지되어 있었다. 명안진사의 핵심심복들과 몸이 성해 부엌일을 하는 몇몇 ‘이모들’ 이외에 장기적으로 머무는 ‘패밀리’들은 불과 열두어 명 정도에 불과했다. 공사가 시작되면서 그들의 일부가 제석궁으로 옮겨 갔기 때문이었다. 거의 전 재산을 명안진사에 바치고 생의 마지막을 이사장의 품안에서 살기로 작정한 사람들이었다. 서너 명은 중증장애를 가진 사람이었고 나머지는 가족과 세상으로부터 버려진 노인들이었다. 말기 암으로 고통받는 노인도 있었다. 모두 명안진사에 들어와 몸이 좋아지고 있다고 말하지만 내가 보기에 노인들은 하루가 다르게 죽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애기보살이 우는 것을 본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식당건물 계단에 쭈그려 앉더니 고개를 무릎 사이에 묻고 애기보살은 소리 없이 울었다. 햇빛이 애기보살의 머리 위에서도 빛났다. 나는 애기보살과 미소보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미소보살은 여전히 비탈길을 걷고 있었다. 그녀에겐 명안전까지 올라가는 길이 구천으로 가는 길처럼 멀게 느껴졌다.
그리고 한참 후 울음소리가 명안전 쪽에서 들려왔다.
미소보살의 울음소리였다. 사람들이 명안전 쪽을 힐끗힐끗 바라보았다. “신경들 쓰지 말고 일이나 해요!” 백주사가 세모눈을 뜨고 소리쳤다. 이사장과 미소보살 사이에 도대체 무슨 대거리가 오고가는지 알 수 없었다. 미소보살의 남편이자 애기보살의 아버지가 청신착란을 일으켜 제석궁에서 여러 사람을 망치로 때려죽인 사건이 문제의 발단일 것이라고 짐작하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백주사는 내내 좌불안석, 여느 때와 달리 매우 불안한 표정이었다. 미소보살이 다시 사라진 것은 그로부터 사흘 후였다.

백주사와 김실장과 컴퓨터 프로그래머와 공사현장을 책임진 젊은 서씨까지 차례로 드나들며 여린의 방에서 안마를 받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여린에게 주기적으로 안마를 받지 않는 건 이사장뿐이었다. 그의 몸을 씻기고 안마를 해온 것은 여린이 아니라 미소보살이었다. 핵심적인 ‘패밀리’가 됐으니, 나도 원한다면 여린의 안마를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백주사가 내게 말해주었다. “피로하면 자네도 세지보살에게 몸을 좀 풀어달라고 하게. 공짜가 아냐. 이사장이 세지보살에게 패밀리들 안마를 위한 수고비를 따로 넉넉히 지불하고 있으이.”
백주사는 설명했다.
그 외에도 여린은 한 주일에 서너 번씩 명안진사로 와서 장애자나 다른 ‘패밀리’들을 안마해주었다. 백주사에 따르면, 그들에게 베푸는 안마는 단순한 안마가 아니라 일종의 치료과정이라 했다. “세지보살님!” 여린이 나타나면 장애자나 노인들이 너나없이 합장하고 절을 했다. 세지보살의 손이 닿기만 해도 닿는 자리마다 꽃이 피는 듯이 신비한 에너지가 솟구친다는 소문이 회자된 것은 진즉부터였다.
내가 자진해 여린의 방으로 올라가는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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