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10) 김일성, 남침 직전 요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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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피(血)는 피로 갚아야 한다’는 등 출병을 요청하는 벽보가 도시·농촌 할 것 없이 난무했다. 1950년 겨울 베이징 교외 난위안쩐(南苑鎭). [김명호 제공]

마오쩌둥의 한국전 참전은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 소련과 북한의 등쌀에 떠밀린 흔적이 역력하다. 1949년 3월 모스크바를 방문한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무력으로 한반도를 통일하겠다”는 계획을 털어놓고 지지를 희망했다. 스탈린은 거절하는 대신 “남한 군대가 싸움을 걸어오면 반격을 핑계 삼아 38선을 넘어버려라. 단 중국의 지지가 있어야 한다”고 충고했다.

김일성은 스탈린이 시키는 대로 했다. 같은 해 5월 초, 마오쩌둥의 속내를 떠보기 위해 노동당 중앙위원 김일(金一)을 비밀리에 베이핑(北平·10월 1일 신중국 선포 후에 베이징으로 개명)으로 파견했다. 김일을 만난 마오는 김일성의 구상을 반대하지 않았지만 동의하지도 않았다. 남한의 뒤에는 미국이 있었다. 전쟁이 벌어지면 북한은 상대가 안 됐다. 중국에 지원을 요청할 것이 뻔했다. 내전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병력을 동북으로 이동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반도에 관심 가질 겨를도 없었다. 대만과 티베트 문제, 서남지역의 국민당 잔존 세력과 토비(土匪) 토벌, 토지개혁 등 생각만 해도 골이 지끈지끈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마오가 말했다. “해방군 주력의 대부분이 남쪽에 있다. 미국이 개입했을 경우 신속한 지원이 불가능하다.” 간단한 대화였지만 여건만 되면 지원을 고려해 보겠다는 의미였다.

한반도에 관심 가질 겨를도 없었다. 대만과 티베트 문제, 서남지역의 국민당 잔존 세력과 토비(土匪) 토벌, 토지개혁 등 생각만 해도 골이 지끈지끈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마오가 말했다. “해방군 주력의 대부분이 남쪽에 있다. 미국이 개입했을 경우 신속한 지원이 불가능하다.” 간단한 대화였지만 여건만 되면 지원을 고려해 보겠다는 의미였다.

한반도에 관심 가질 겨를도 없었다. 대만과 티베트 문제, 서남지역의 국민당 잔존 세력과 토비(土匪) 토벌, 토지개혁 등 생각만 해도 골이 지끈지끈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마오가 말했다. “해방군 주력의 대부분이 남쪽에 있다. 미국이 개입했을 경우 신속한 지원이 불가능하다.” 간단한 대화였지만 여건만 되면 지원을 고려해 보겠다는 의미였다.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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