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희미한 청춘의 기억들...그때 그노래와 떠나는 시간 여행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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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호 05면

‘남들도 모르게 서성이다 울었지/ 지나온 일들이 가슴에 사무쳐/ 텅 빈 하늘 밑 불빛들 켜져 가면/ 옛사랑 그 이름 아껴 불러보네…눈 녹은 봄날 푸르른 잎새 위에/ 옛사랑 그대 모습 영원 속에 있네’. 이런 노랫말이 있었다. 한없이 가볍고 직설적이며 일차원적 욕망을 자극하는 원색적인 노래들이 눈과 귀를 지배하는 요즘 세상과 섞일 수 없는 서정적인 노래다. 1980~90년대 초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며 솜사탕에 얼굴을 묻고 자판기 커피를 뽑아 마시면서 데이트하던 그때 그 시절의 정서다.

뮤지컬 ‘광화문 연가’, 4월 10일까지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그렇게 청춘을 보낸 세대들의 감수성을 평정했던 이문세의 노래들로 꽉 채워진 창작 뮤지컬 ‘광화문 연가’는 이 노래 ‘옛사랑’으로 막을 올렸다. 85년부터 이문세와 함께 수많은 히트곡을 내며 한국 대중음악에 팝발라드라는 장르를 각인시킨 작곡가 이영훈. 뮤지컬은 2008년 세상을 떠난 그가 직접 기획하고 오랫동안 준비했던 마지막 꿈이다.

그 꿈을 프로듀서 김승현, 임영근 등 그의 오랜 지인들이 3년 만에 이뤄낸 무대는 이영훈의 진정한 유작이라 할 수 있다. 병으로 죽음을 앞둔 백발이 성성한 중년의 작곡가가 새하얀 그랜드피아노 앞에 앉아 현재와 과거의 막을 걷어내고 자신이 만든 노래들을 더듬어가며 청춘과 함께 묻었던 ‘옛사랑’을 들여다본다. 바로 그 작곡가 이영훈의 노래에 ‘정서적 빚을 지고 살아가는’ 8090세대들은 ‘소녀’에서 ‘광화문 연가’까지, 젊음을 함께했던 첫사랑의 노래 30여 곡에 파묻혀 잃어버린 청춘의 기억을 그 감성 그대로 되살려보는 시간여행을 떠난다.

작품은 80년대에 20대를 보낸 세대들에게 시대 정신이자 공통 기억인 민주화 항쟁을 배경으로 한다. 격렬했던 젊음의 투쟁 속에서 싹텄던 사랑과 우정을 이영훈의 노래들처럼 때론 애절하고 때론 유쾌하게 펼쳐보이는 ‘추억의 재구성’이다. 교보문고와 덕수궁 돌담길, 공중전화 박스 같은 기억의 유물 위에 추억은 되살아나고 아예 오선지 악보로 만들어버린 담벼락이 펼쳐지면 내 청춘의 사랑 이야기도 노래가 된다.

작곡가 상훈(윤도현·송창의)과 운동권 후배 현우(김무열·임병근), 신인가수 여주(리사)의 삼각사랑은 뻔한 소재지만 진부하기에 오히려 ‘누구나 간직하고 있는 첫사랑’에 대한 공감대를 확장했다. 과거를 낯설게 들여다보는 현재의 상훈의 시점은 해묵은 기억을 새삼스럽게 더듬어가는 장치로 작용한다. 지켜보는 사랑, 져주는 사랑을 더 큰 사랑으로 노래하는 이영훈 미학은 ‘헤어진다는 건 그저 떨어져 있는 것일 뿐, 떨어져 있다고 사랑할 수 없는 건 아니’라며 옛사랑의 기억을 보듬는다. 진국·정숙 역의 명품 조연 김태한·구원영 콤비의 맛깔스러운 코믹 연기는 자칫 신파조로 흐를 뻔한 극에 활기를 불어넣으며 추억으로 떠나는 우리의 여행이 우울하지 않게 무게중심을 잡아줬다.

기존의 노랫말에 드라마를 덮어씌운 주크박스 뮤지컬의 한계일까. 주인공들의 캐릭터가 제대로 살지 않아 노래의 정서를 극이 온전히 뒷받침해주지 못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뮤지컬도 결국 사람의 이야기인 때문에 아름다운 노랫말도 감정이입의 실체가 없으면 공허한 울림이 될 뿐이다. 현재와 과거를 넘나드는 구성은 절묘하게 시작됐지만 갈수록 산만하게 흘러 뒷심 부족을 드러냈다. 결국 이 뮤지컬의 주인공은 오직 이영훈의 노래다. 그 노래에 울고 웃던 내 청춘의 감성이 물결쳐 드라마의 감정선이 아닌 내 기억만으로도 감동과 향수에 젖을 수 있기 때문이다. 캐릭터가 불분명한 탓에 배우들의 연기는 단조로웠지만 명곡에 생명을 불어넣는 발군의 가창력과 혼신을 다한 열창은 강한 인상을 남겼다. 1막의 피날레를 장식한 리사의 ‘그녀의 웃음소리뿐’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쇼킹한 창법으로 이 작품의 시그니처로 인정할 만하다.

죽어서야 첫사랑을 그때 그 모습으로 다시 만나는 상훈. 고인이 된 작곡가에게 바쳐진 피날레는 극과 현실의 경계를 허물고 감동으로 다가왔다. 전 출연진이 검은 정장으로 갈아입고 등장해 작곡가를 에워싸고 되풀이해 부른 ‘붉은 노을’의 한 소절 ‘난 너를 사랑해’. 노래방도 없던 시절 그의 노래들을 모조리 외워 부르던 관객들의 마음속에도 작곡가 이영훈을 향한 진심 어린 사랑 고백의 메아리가 울려퍼졌을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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